아킬레우스의 노래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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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테티스는 아들 아킬레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면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것을 알고 그를 리코메데스에게 보낸다. 여장을 시켜 여인들 무리 속으로 들여보낸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를 찾아간다. 이미 아킬레우스와 사랑을 나눈 데이다메이아는 파트로클로스를 속인다. 무희들 틈에서 춤을 추고 있는 아킬레우스를 파트로클로스는 단번에 찾아낸다. 그가 금발을 감추고 여인처럼 섬세한 춤을 추고 있다고 해도 파트로클로스는 사랑하는 이를 발견한다. 


  사랑은 숨길 수 없다. 필멸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들이 벌이는 사랑에는 어리석고 불안한 기운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불멸의 길로 아들의 운명을 이끌고 싶었던 어머니 테티스에 의해 약점이 드러나는 아킬레우스의 사랑은 도저히 숨겨지지 않는다. 바다의 님프 테티스는 아들을 신의 공간으로 끌고 들어가고 싶어 했다. 죽을 운명을 가진 인간 파트로클로스가 아들 곁에 머무는 것을 반대한 이유이다. 나이가 들고 병이 생긴다. 죽는다. 묘석 하나만 남아 기억도 추억도 없이 사라지는 인간과의 사랑은 부질없다. 사랑은 죽음을 부른다. 사랑이 있기 때문에 죽을 수 있다. 


  매들린 밀러의 장편 소설 『아킬레우스의 노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의 대사에서 시작한 소설이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가 죽자 절규한다. 아가멤논과의 불화에서 시작된 비극은 죽음을 부른다. 세계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헬레네를 데려오기 위해 시작한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운명은 신의 손으로 넘어간다. 전쟁에 참가하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킬레우스 자신의 죽음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설은 파트로클로스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나'로 시작하는 소설의 서사는 몰입이 가능하고 이입이 추가된다. '나의 아버지는 왕이었고 왕의 자손이었다'로 밝히는 '나'의 이야기. '나'는 그런 아버지를 둔 자식 답지 않게 약하고 가냘팠다. 빠르지 않고 튼튼하지도 않았다. 노래도 못 불렀다. 아프지 않고 건강한 것만이 유일한 장점이었다. '나'를 낳은 어머니는 백치였다. 아버지가 주관한 경기에서 그를 처음 만난다. 금빛 머리카락이 빛나게 달리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년. 우승을 한 그에게 아버지는 월계관을 씌워주고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들은 저래야 하는 거다."


  주사위를 뺏으려는 아이를 밀쳐 죽이고 '나'는 금과 함께 프타아로 쫓겨난다. 그곳엔 어머니가 여신인 아들 금빛 머리카락에 월계관을 쓰고 환하게 웃던 그 소년 아킬레우스가 있었다. 펠레우스는 버림받은 왕자들을 데리고 훈련을 시키며 키우고 있었다. 소년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나',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당당함과 아름다운 외모에 마음을 빼앗긴다. 


  수많은 소년들이 아킬레우스 주변을 서성인다. 아킬레우스가 던진 무화과 하나가 파트로클로스 손바닥에 들어오면서 그들의 운명은 테티스의 감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착한 켄타우로스 케이론에게 훈련을 받으면서 두 소년은 소년 시절을 보낸다. 


그의 목소리가 바위 위로 흐르는 강물 소리와 섞이면서 아킬레우스와 나 사이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어색함을 해소시켰다. 흔들림 없고 차분하며 귄위 넘치는 케이론의 표정에는, 지금 이 순간에 하는 놀이와 그날의 저녁식사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로 우리를 되돌아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가 옆에 있으니 그날 바닷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심지어 켄타우로스 특유의 몸집 덕분에 우리 몸이 더 작게 느껴졌다. 어쩌다 우리는 우리가 어른이 된 줄 알고 있었던 걸까?


  여신 테티스는 아들 아킬레우스를 끊임없이 찾아온다. 인간에 불과한 파트로클로스와 자신의 아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신이기에 인간의 운명을 예언하고 운명을 바꾸려 한다. 신이기에 인간의 일에 개입하고 길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만 신의 몸으로 태어난 아킬레우스는 예언과 운명을 뒤에 둔다. 오직 파트로클로스와 함께하는 시간이 존재할 뿐이다. 그에게는 신의 예언 따위 중요하지 않다. 시절과 순간을 살아가는 사랑이 그의 생을 끌고 간다. 불멸이 아니라야 한다. 영원히 살아가는 것은 영원히 고통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죽음이 있기에 사랑을 한다.


  왕의 자손이면서 거짓말도 하지 못한 채 쫓겨온 파트로클로스의 삶으로 뛰어든 아킬레우스는 노래를 불러주고 몇 번의 끈질긴 질문에도 처음 듣는 질문 인양 대답해준다. 나의 생에서 꿈틀거리는 불안과 적막을 공허를 달래주는 사랑을 만난 것이다. 소설의 문장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알고 사랑을 느끼는 모든 이들을 격정 속으로 몰아간다. 전쟁에서조차 그들은 화살을 막아주기 위해 갑자기 나타난다. 죽은 뒤에 남아 있는 명성을 위해 대신 갑옷을 입고 전쟁 속으로 뛰어든다. 공기로 남은 '나'를 위해 저승에서도 함께 하기를 원한다. 


"내가 써두었다." 그녀가 말한다. 처음에 나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가 비석 위에 새긴 이름이 내 눈에 들어온다. 아킬레우스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그 옆에 파트로클로스가 있다.


 우리가 필멸의 존재로 살아가고 죽어가는 동안 사랑은 나란히 이름 두 개를 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랑이 남고 두 개의 그림자가 마주 본다. 나의 아킬레우스, 나의 파트로클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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