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눈송이 봄날의책 세계시인선 2
사이토 마리코 지음 / 봄날의책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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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한국어 공부를 하기 위해 사이토 마리코는 '입국'합니다. 시인이었던 그녀는 연세대와 이화여대에서 공부를 하면서 한국어로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일본어로 쓰고 한국어로 번역. 그러다가 차츰 생각이 넓어져 한국어로 곧바로 시를 씁니다. 1987년으로부터 4년 밖에 지나지 않은 한국. 그녀의 눈에 이곳은 최루탄 가스가 퍼지고 보도블록과 유리가 깨지는 거리였습니다. 어학당에서 내려오는 길에 깨진 유리에 반사된 빛을 보다가 그 이미지를 가져옵니다. 말로 다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토해냅니다. 한국으로 오기 위해 책을 처분한 그녀가 헌책방 할아버지와 나누는 대화가 시집에 실려있습니다. 


서시

-사이토 마리코


커다란 나무는

그대로 한 권의 역사책이다

잎사귀 하나하나가 한 페이지에

해마다 새로 쓰여

해마다 새로 태어나는 책.

하루 종일 바람이 읽고 있다

가끔 언더라인한다.


  한국 생활 1년 2개월에 걸쳐 쓰인 시들이 담긴 시집 <입국>은 한동안 절판되었습니다. 시인이 남긴 그 책들은 서점에서 헌책방으로 누군가의 책장으로 흘러들어갑니다. 시를 썼다기 보다 시가 쓰였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녀는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시들을 써 냅니다. 그녀 자신도 어떻게 그렇게 많은 시들을 썼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라고 했습니다. 

  책들의 무게는 나무의 무게입니다. 책이 무거운 이유는 나무 한 그루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판 그녀의 책들은 어디로 가닿아 있을까요. 내가 읽지 않아도 바람이 햇빛이 책장을 넘기면 책의 임무는 다하여지는 것입니다. 밑줄을 그어놓고 도망가는 구름과 새와 비. 색이 바란 그 책들 안에는 나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서울

-사이토 마리코


사람이 어깨만이 돼서 거리에 넘친다

버스 기사님이 어깨만이 돼서 우리를 싣고 달린다

연인들이 어깨만이 돼서 타박타박 걸어간다


이 거리는 어깨만으로 남아 서 있다


사람들이 어깨만이 돼서 부딪쳐 간다

버스 기사님이 어깨만이 돼서 우리를 버리려 달려간다

연인들이 어깨만이 돼서 넘어져 간다


이 거리는 어깨만 남아 짖는다

어깨너머 잊힌 달이 헐떡거린다


이 어깨에는 그림자가 없다


  외국인인 시인의 눈에 비친 서울은 어깨들이 부딪치는 곳이었습니다. 어깨와 어깨가 함께 걷는 이상한 나라의 서울. 민주화의 물결이 어깨로 이루어진 곳. 외국인이 아니어도 나는 그 거리에서 이방인이었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걷느라 발자국만을 따라갔습니다. 차라리 무표정을 지으면 어떨까, 힘들게 웃음 짓는 얼굴들에서 피로와 졸음을 보았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입을 다물고 오해를 할까 봐 실없이 웃기만 했습니다. 모두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밤에도 볼 수 없었습니다. 


신촌 부근

-사이토 마리코


사람을 경멸하면

가슴에 금세 시큼한 꽃이 피고

하룻밤 자도 그것이 안 시들 때

햇님이 녹색으로 보인다


저 산 가서 이 꽃을 도려내

매장하고 싶다

악수 받으러 가는 사람들 따라

아침의 통근 시간 학교도 회사도 빠지고

저 산으로, 약수 받으러 가는 사람들 따라


하지만 이 좁은 길 하나를 건너갈 수 없다


  시인이 일본으로 돌아가고 그녀의 행방을 알 수 없어 판권 계약을 하지 못해 시집이 다시 나올 수 없었습니다. 어디서든 시를 쓰고 있지 않을까. 시가 아니어도 문학 안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짐작만 할 뿐이었습니다. '봄날의 책'이라는 출판사에서 그녀의 시집이 다시 나왔습니다. <입국>에서 <단 하나의 눈송이>로. 시인은 시를 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시를 다시 쓰게 된 계기는 2011년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 때문이었습니다. <단 하나의 눈송이>에는 그때 이후에 쓴 세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입국>에 담긴 시를 쓸 때의 기분과 느낌들이 짤막하게 담겨 있습니다. 전부 기억나진 않다고 밝힙니다. 기억나는 시들의 느낌이 들어 있습니다. 시인이 건너려던 길은 일본어와 한국어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는 것부터 출발합니다. 

  시인은 일본에서 한국문학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번역한 작품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었습니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철거 지역의 쓸쓸함과 황량함이 시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때의 장면들을 잊지 않고 있으면서 난쏘공을 읽은 것일까요. 처절하게 아름답고 황폐한 슬픔이 담겨 있는 그 소설에서 시인은 자신의 유학 생활을 떠올렸겠지요. 다행입니다. 살아 있고 시를 쓰고 문학을 읽고 있어서. 

  시를 쓰는 일은 시를 읽는 일은 언어의 경계를 넘나듭니다. 언어는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이 가진 시집에 바람이 언더라인 하고 지나가는 걸 보기만 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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