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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 제8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ㅣ 문학동네 청소년 39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평점 :
안녕, 언니
아빠의 편지를 읽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놀라고 놀라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어. 한참을 멍하니 편지만 들여다보았어. 아빠의 글씨가 자꾸 흐려졌어. 언니가 보내온 편지의 잉크가 흐려진 것처럼 글씨들은 차츰 내 눈에서 날아갔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 아빠의 편지를 읽고 언니가 보낸 마지막 편지까지 읽고 나자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났구나, 언니와 나의 세계가 이렇게 하나로 합쳐졌구나를 깨달았어. 미안해, 언니.
언니와 똑같은 이름을 나에게 지어주고 떠난 언니. 우리가 같은 이름이라면 어디서든 어느 세계에서든 서로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는 언니의 말은 반쯤은 맞고 반은 틀렸어. 2016년에 살고 있는 내가 쓴 편지를 1982년에 살고 있는 언니가 받은 것, 신기하고 이상하게 여겼지. 우리가 같은 이름을 가졌다는 것도 하나의 우연이라 생각했잖아.
언니, 언니, 언니. 어떻게 미래와 과거의 시간이 일치해서 우리가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는지 이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우리의 시간은 언니가 마지막까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바람 때문에 이루어진 거야. '세상에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특별한 일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일 거야.' 언니와 나는 특별한 일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거야.
과거의 언니와 현재의 엄마의 조언대로 나는 독립을 하지 않기로 했어. 아빠는 점점 웃는 일이 많아지고 나와 함께 하려고 시간을 많이 준비하고 있기도 해. 이제 나도 알아. 그동안 아빠는 나를 보면서 힘들었을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했던 것이라는걸.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아빠가 나에게 무관심하고 미워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어. 과거의 아빠를 알고 있는 언니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지만 나는 지금의 아빠가 싫었어. 생일에 단 한 번도 미역국을 먹은 적도 선물을 사다 준 적도 없는 아빠. 그런 아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던 내가 밉기도 해. 언니는 말했지. '어쩌면 가족이라는 존재는 더 많이, 더 자주 이해해야 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르지'라고.
가족이기 때문에 무조건 나를 지지해주고 사랑해주어야 한다는 오만이 나에게는 있었어. 내가 먼저 아빠를 이해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아빠가 나를 더 많이 이해하기를 바랐던 걸까. 먼저 내가 손 내밀지 않으면서 나를 끌어안고 다독여주길 바란 걸까. 이제 나는 알아, 가족이기에 더 많은 이해와 대화와 사랑을 나눠야 한다는 것을. 2017년의 나는 이제 새로운 가족이 생겼어. 이름은 다정인데 다정하지 못한 일을 하는 새엄마와 함께 나는 잘 지내고 있어. 그동안 나 때문에 운전을 하지 못했던 아빠는 차를 한 대 사서 운전을 시작했어. 웃기지? 자동차 회사에 다니면서 운전도 안 하고 차도 없던 아빠가.
중2병이 끝나가고 있어. 그동안 내가 보낸 편지가 언니의 세계에 도착해 언니의 인생을 이상하게 비틀었을지도 모른다는 자책에 빠져 있었어. 언니가 보내온 편지를 다시 읽으면서 잉크가 희미해진 그 편지들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언니는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어. 미래에서 날아온 나의 편지를 받았고 그런 나 때문에 아빠를 만난거지. 2000년이 시작되는 날 미래의 나는 언니 안으로 들어갔던 거잖아. 더 많이 기쁘고 더 많이 행복해, 지금은.
언니, 고마워. 끝까지 아빠를 사랑해주고 나를 지켜주어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나를 손 잡아주고 어깨를 감싸준 언니의 말들을 잊지 않을게. 우리가 사랑했다는 것. 이 세계에서 우리가 한 번은 만났다는 것을 알게 해주어서, 고마워. 여전히 이 세계는 바쁘고 복잡해. 아직 내게 꿈은 없어. 어른이 돼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 그래도 우리는 사랑하고 웃고 울며 이 세계를 지켜나가는 것으로 우리의 한 세계를 건너갈게.
사랑해,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