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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ㅣ 걷는사람 세계문학선 1
오야마다 히로코 지음, 한성례 옮김 / 걷는사람 / 2017년 9월
평점 :
오야마다 히로코의 『구멍』은 마스다 미리의 산문집 『그렇게 쓰여 있었다』를 읽으며 알게 된 소설이다. 마스다 미리는 소설 『구멍』을 읽고 있다고 산문집에서 쓰고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가 읽는 소설이라면 당장에 읽고 싶다. 찾아보니 '걷는사람'이라는 출판사에서 세계문학선1권으로 나와 있었다. 예스24에서 작은 출판사 응원 프로젝트로 중쇄를 찍게 하자는 이벤트도 한다(http://www.yes24.com/campaign/01_book/2017/1017Publish.aspx?EventNo=4&CategoryNumber=001). 외국 소설의 경우 번역이 되어 있지 않으면 책을 읽을 수가 없다. 다행히 이 출판사에서 나온 오야마다 히로코의 『구멍』이 있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소설 『구멍』에는 세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표제작인 「구멍」의 이야기는 기묘하다. 실려 있는 세 편의 이야기들은 기이하고 환상적이다. 「구멍」은 남편의 전근 때문에 시집 근처로 이사를 하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녀는 비정규직으로 직장에서 이름 말고 성인 마쓰우라로 불린다. 정규직과 보너스는 21배 차이가 난다. 촌지라고 쓰인 봉투에 담긴 돈을 가방에 쑤셔 놓고 쓰지도 않은 채 이사를 한다. 일을 그만둔다는 말에 동료 여성은 부럽다고 말한다. 일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 생활을 하고 싶다는 동료의 말에 마쓰우라는 일을 하지 않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 선뜻 대꾸를 하지 못한다.
정규직이 아니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급여 차이는 심각하다. 마쓰우라는 불편한 교통수단이 아니더라도 더 일을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고민을 나눌 동료도 한 사람 밖에 없다. 그마저도 심각한 고민이 아니라 잡담 수준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회사 안에서는 사람들과의 교제조차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눠진다. 일을 하는 여성으로 묘하게 활달한 시어머니가 있고 말이 없는 시아버지, 고령이신 시할아버지가 있는 본가로 들어가면서 마쓰우라의 일상은 전보다 한가해진다.
일을 하지 않는 자신의 일상과 맞닥뜨리면서 마쓰우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남편의 월급만 받아서 사는 건 옳은 일인가 생각에 빠진다. 시어머니가 집을 빌려줘서 생활비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집세를 내지 않아서 비용은 절약되지만 어쩐지 자신이 한심하게만 느껴진다. 시어머니의 부탁으로 편의점에 공과금을 내러 가다가 검은 짐승을 본다. 짐승을 따라가다 구멍에 빠지는 마쓰우라. 그 앞에 옆집 여자가 나타나 그녀를 구해준다. 자신만 본 것만 같은 짐승을 따라 구멍에 빠진 이후 그녀는 이상한 만남들을 가진다. 그녀는 구멍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공장」은 카프카의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을 만드는지 모르는 거대한 공장 안에서 일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젊은 작가는 이 세계의 비인간적인 모습들을 세밀하게 나열한다. 정규직으로 알고 면접을 보러 왔지만 일은 이상하게 진행되어 비정규직으로 그것도 문서파쇄실에서 일하는 스물여섯의 여성 우시야마. 대학교수의 추천으로 옥상녹화사업과 이끼 연구회라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업무를 맡은 후루후에.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정리 해고를 당해 공장에서 나오는 모든 서류의 교정 작업을 맡게 된 서른한 살의 남성 우시야마.
문서파쇄실에서 일하는 여성과 교정을 보는 우시야마는 남매다. 같은 집에서 살지만 서로 어떤 곳에서 일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오빠는 동생이 비정규직인 게 불안하고 동생은 오빠가 여전히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점심시간에 우연히 오빠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었구나 알게 된다. 공장은 거대하다. 각종 편의시설이 있고 버스가 북쪽과 남쪽을 옮겨 다닌다. 출입증의 줄 색깔로 직급을 나눈다. 고토라는 인사 담당자가 이들을 채용하고 업무를 맡기뿐이다. 정확히 그들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설명을 하지 못한다. 그곳은 거대하고 바쁘고 수시로 사람들이 바뀐다.
이끼 연구회라는 일을 추진하는 후루후에는 초등학생이 쓴 공장에서 서식하는 동물 보고서를 받는다. 초등학생은 보고서에 '회색뉴트리아', '세탁기도마뱀', '공장가마우지'의 생태를 자세히 적어 놓았다. 배수구와 세탁기, 공장의 하늘에 사는 그들을 자세히 관찰하는 공장 사람들은 없다. 원래 그것들이 공장에서 살아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할 뿐이다.
오빠 여자친구에게 험담을 들은 우시야마는 반차를 쓰고 공장을 산책한다. 걸어서 다리까지 건너간다. 그곳에서 새의 사진을 찍는 후루후에를 만나 점심을 같이 먹는다. 후루후에가 공장에서 하는 일을 듣고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아 질문을 한다. 당신의 일이 공장에서 어떻게 진척이 되고 성과를 보이는지에 대해서. 성과도 보이지 않는 일을 하면서 정규직으로서 비정규직이 누리지 못하는 복지와 혜택을 받고 있는 것에 비난으로 들리는 것 같아 후루후에는 긴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오야마다 히로코가 그리는 세계는 정규직으로 살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암담한 오늘의 세계이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름과 나이를 알려주지 않은 채 몇 살로 보이느냐는 질문을 하고 끝내는 이름과 나이를 말해주지 않는다. 업무를 알려줄 때는 친절한 얼굴을 꾸미지만 그 이후에는 잡담조차 하지 않는다. 일하러 갔는데 잡담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반문도 들지만 알지 않나, 말이 없는 침묵의 시간들을 견디다 보면 일이 아니라 정신이 먼저 지친다는 것을. 말을 걸어 주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에 낄 수 없다. 어쩌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생각과는 다르게 말이 엇나가서 꼬투리를 잡힌다. 그러다 보면 말을 할 수 없다. 점심도 혼자 먹어야 한다. 비싼 점심을 사 먹지 않는 그들은 도시락을 싸와서 먹는다는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는다.
문서파쇄실에서 일하는 우시야마는 회식 자리에 참석한다. 고기 대신 내장만을 주문해 먹는 그 자리에서 자신은 그동안 악의에 노출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표정이나 말투에서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그 정도는 아는 것이다. 우시야마는 언제까지 종이를 넣고 파쇄하는 그 일을 할지 모르지만 이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님을 안다. 함께 일하는 동료의 이름과 나이를 모르는 그곳에서 보람이나 노동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일을 해야 의미가 있다, 사람은 번듯한 직장을 가져야 한다. 이런 말들이 요즘 시대에는 폭력으로 다가온다. 일본이나 한국 사회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갈수록 심각해진다. 파견 사원, 계약직 사원, 비정규직은 다른 단어처럼 들리지만 그들은 같은 일을 하지만 정규직과는 다른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다. 직원 전용 식당은 들어봤지만 정규직 전용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 보너는 21배 차이가 난다. 「구멍」의 마쓰우라도 「공장」의 우시야마들도 비정규직의 구멍에 빠져 결국엔 공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공장 안에서 서식하는 공장 동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마쓰우라가 본 검은 짐승은 공장에서 서식하다 이탈한 공장 동물의 하나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자신이 점점 공장 동물로 변하는 체험을 하는 사람들. 오야마다 히로코의 직장은 쓰무라 기쿠코의 직장보다 더 암담하고 오늘의 오후마저도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는 공포로 가득한 곳이다.
매일 구멍에 빠졌다가 동물로 변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지상 위로 올라온다. 마쓰우라는 다시 비정규직인 편의점에 일을 한다. 도처에 널려 있는 비정규직이라는 구멍을 피할 수 없다. 그 구멍에 빠지게 되면 공장으로 이어지는 길로 안내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