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어비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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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진의 소설집 『어비』는 잘 읽힌다. 아홉 편의 소설들이 실려 있는데 그 이야기는 하나같이 나의 어느 하루를 옮겨 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소설의 문장은 단문으로 끊어지다가도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난해한 묘사와 서술은 없다. 인물들의 뒤를 착실히 따라가는 문장은 나를 광화문이나 대한문 근처로 데리고 간다. 단 한 번 가본 그곳은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데도 천막이 들어차 있었고 그 안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서명을 하고 모금함에 작은 돈을 넣었다. 기억은 자꾸만 흐려졌지만 김혜진이 부려 놓은 소설의 풍경은 현실의 일들과 맞물린다. 

  인터넷 서점의 물류 창고에서 일하는 '나'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가 나중에 운영하는 인터넷 방송에서 자신의 닉네임을 어비라고 지은 것을 보고 그렇게 부를 뿐이다. 어비는 물류 창고 앞마당에 부려 놓은 개의 이름이기도 했다. 「어비」에서 '나'는 그의 이름을 끝내 부르지 못한다. 사는 곳과 일상의 일들을 질문했으나 그는 단 한마디도 돌려주지 않는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어비는 열심히 일하지만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 때문에 근면함이 가려지는 사람이다. 먼지를 먹고 짧은 휴식을 가지며 사람들과 불필요한 대화를 이어가는 일들을 하다 보면 조장이 되기도 하고 팀장이 될 수도 있지만 '나'는 좀 더 일 다운 일을 찾으려 그만둔다. 어비는, 음식을 먹고 불 꺼진 창고가 우주 센터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상한 방송을 진행한다. 그 일은 그래도 되는 건가, 그렇게 돈을 벌어도 되는 건가 의심이 드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나'는 한다. 

  20년 동안 일한 직장에서 해고된 엄마를 도우는 「아웃포커스」의 '나' 역시 잠깐 머물다 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의점에서 일한다. 1인 시위를 하는 엄마를 위해 박스로 핸드폰을 만든다. 할머니의 묏자리 문제로 가족 모임에 대신 나가려고 편의점 사장에게 무수한 양해를 구한다. 양해를 구하다가 결국엔 나오지 말라는 연락을 한낮의 거리에서 듣는다. 철거 용역으로 일을 나섰다가 반대 시위를 하는 여자를 해결하라는 말에 산에 올라가 여자에게 겁을 주는 이야기, 「한밤의 산행」. 치킨 배달을 갔다가 원룸에 사는 사내의 자살을 도와주는 배달원의 실패기를 담은 「치킨 런」. 

  김혜진의 소설속 인물들은 남이 고개를 끄덕일만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단기 알바를 하거나 편의점, 철거 용역, 배달원, 백수, 취업 준비생으로 불확실한 미래만을 소유한 자들이다. 그들은 생판 모르는 남에게 일다운 일을 하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그저 산책을 다닐 뿐인데 무슨 일이냐는 질문을 받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사람들이다. 모국어로도 영어로도 대화할 수 없는 그들은 대화를 하다 정작 몇 개의 단어로도 소통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닫힌 문을 열기 위해 어려운 어휘와 문법이 필요 없음을 알지만 만남은 더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나는 지하철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런 날에는 그녀도 줄넘기에 몰두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골목 귀퉁이에서 묵묵히 줄을 돌리는 그녀를 상상했다. 지구를 벗어났다 되돌아오는 그녀의 실루엣은 고독했고 그때야 나는 우리가 고독을 나눠 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둘은 한때 우리였다가 이제 우리를 벗어나는 중이었으므로. 우리가 나눠 가진 고독의 무게 또한 비등할 것이었다. 한 번에 하나,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이단 뛰기가 가능해지고 삼단뛰기도 능숙해지지 않을까. 하나, 하나, 하나. 줄은 공중에서, 바닥에서, 수시로 정지했다. 

(줄넘기 中에서)


  「줄넘기」의 '나'는 삼 년 동안 만난 그녀에게 지겹지 않냐는 질문을 끝으로 헤어짐을 통보받는다. 그가 하는 일이란 밤의 공원에 나가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둘러보는 것이다. 한밤중에 선글라스를 끼고 줄넘기를 하던 노인이 말을 걸어온다. 10년째 줄넘기를 하고 있다는 노인은 그에게 줄넘기를 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다. 700개를 뛰고 노인과 대화를 하면서도 '나'는 노인이 왜 선글라스를 끼는지 눈치채지 못한다. 

  사람들의 표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대화를 할 때 상대의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데 어떤 사람의 눈은 쉽게 쳐다볼 수가 없다. 눈을 보고 표정을 살피는 대신 딴 곳을 응시하고 고개만 기계적으로 끄덕인다. 김혜진의 소설 속 인물들은 상대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한다. 그들의 대화는 어긋나고 어떤 순간에는 해야 할 말조차 하지 못하는 지점에 다다르기도 한다. 바로 앞 상대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게 만드는 그들이 가진 생활의 우울과 피로들을 상상한다. 

  한 번에 하나,  「줄넘기」의 노인은 '나'에게 줄넘기 넘는 요령을 그렇게 알려준다. 노인이 왜 선글라스를 끼고 한 밤에 줄넘기를 하는지 노인의 동호회 회원들을 만나고 나서 알게 된다. 헤어진 연인의 집 앞에 가서 우편함에 들어있는 고지서를 확인하는 '나'. 그 요금들을 다 내주면 더 좋겠다는 연인. 세상의 비밀과 놀랄만한 이치를 한꺼번에 알 수 없다. 줄넘기를 돌리다 보면 줄넘기를 돌리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세상의 뒷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뒷면 같은 김혜진의 소설들. 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내가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사람들의 오늘이 소설의 뒷장에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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