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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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을 부른다. 낙엽이 짓밟혀 흔적조차 남지 않은 마른 길을 걸어갈 때. 마주 앉아 밥을 먹다가 말이 끊어질 때. 붉은 달이 뜬 걸 보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오늘을 쉽게 넘기려 들 때. 타인에게는 결코 보여줄 수 없는 표정을 숨기느라 속이 타들어갈 때 고요히 이름을 불러본다. 두 음절의 단어를 뱉고 나면 바람이 불어와 젖은 마음들을 말려주고 떠난다. 불안은 잠시 수그러들고 고통의 얼굴을 외면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시간은 착실히 적립되어 달력을 찢어내는 일이 가장 귀찮은 일이 되곤 한다. 어떤 나무들은 벌거벗은 제 몸을 드러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데 나는 딱딱한 가면을 쓰고도 눈을 맞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기만 할 뿐이다. 언어는 빈 공간으로 사라지고 이야기의 파장이 남는다. 무지개색으로도 나의 산 영혼을 위로하지 못하는 빛의 공허함이 번진다. 

  어깨에 들어차는 한기를 이기지 못한다. 한파 뒤에 찾아온 영상의 날씨에도 춥다는 착각에 빠져 산다. 춥지 않다. 이불 두 어채가 바닥에 깔려 있고 버튼을 누르면 온수가 쏟아져 나온다.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언제나 자신은 공평했다는 듯 태양은 자신의 열기를 우주 밖에서 쏘아 주고 있다. 빨래는 반나절만에 마르고 빛이 들어온 자리에 발바닥을 대고 있으면 따뜻하다. 추웠다. 그 겨울의 긴 날들은 수도가 터지고 얼지 않은 수도에서 길어온 물을 데워 씻었다. 남극의 펭귄들이 허들링을 하며 추위를 이기는 다큐를 보면서 이곳은 도대체 왜라는 의문이 들 만큼 그 방은 한기로 가득했다. 전기난로 불이 새어 나가지 않게 여름 이불로 창문들을 막았다. 붉은빛을 보고 문을 두드려 난로를 쓰고 있느냐는 주인의 방문을 받고 싶지 않았다. 새어 나갈 빛도 들어와야 할 빛들의 자리조차 마련할 수 없었던 겨울의 긴 시간들 때문에 지금 춥다. 

  소설가 정미경의 『당신의 아주 먼 섬』은 살아 있는 자들이 안고 가야 할 기억에 관한 질문과 대답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바닷물이 쓸려 나가면 건너서 섬과 사이를 갈 수 있는 포도알을 뿌려 놓은 듯한 섬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서 기억들은 만난다. 지하철과 빌딩으로 들어찬 도심 속에서 수업이 시작됨과 동시에 잠이 드는 텅 빈 시간 속에서 도망친 지친 기억들은 섬에서 만난다. 말하고 싶지 않아도 떠들어야 하고 듣고 싶지 않아도 신중하게 듣고 있다는 포즈를 취해야 하는 작위의 공간에서 벗어난 그들의 이야기는 소금밭에서 풀어진다. 

   『당신의 아주 먼 섬』의 문장은 인물들의 상처받은 속내를 다독이느라 머뭇거리고 주저한다. 정미경은 그 자신이 소설과 인물을 만들어내는 자라도 그들을 대하는데 조심스럽다. 섬에서 살고 섬으로 도착한 자들의 사연을 쉽게 말하려 들지 않는다. 독자에게 충분히 호흡하고 생각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문장의 템포를 늦춘다. 느린 문장의 결을 더듬어 따라가면 현실의 시간은 밀려나고 우리가 살았던 겨울의 과거로 이주해 있다. 과거에서 만나는 이우와 정모, 판도의 기억은 어느새 섬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섬에서 마주한 그들은 서로의 표정을 살피고 식사를 챙기고 읽었으면 좋을 책들을 건네주는 것으로 과거를 보듬는다. 


"아니, 색깔이 아니라 빛. 투명하고 눈부시고 설레는."

"사랑했구나."

"사랑? ······사랑인 줄은 어떻게 알아?"

"글쎄, 어떻게 알까."

"한 번도 안 해봤어?"

"그럴 리야."

"아저씨,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파도 소리가 한소끔 지나갔다.

"죽는다는 건 영혼이 우주 저 멀리로 날아가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데칼코마니처럼 여전히 곁에 있는 것 같아. 나란히. 엄마 말처럼, 내가 정말 미친 건가?"


  이우의 시간은 태이와 함께 했던 과거의 시간에 묶여 있다. 현재를 사는 이우에게 밤은 불면을 이기지 못하고 바닷속으로 밀려 들어가고 싶은 어두움이다. 빛없는 밤을 견딜 수 없는 이우는 섬 안으로 들어와 미래의 자유와 꿈들을 유보하고 있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판도와 만나 밤바다의 파도 안에서 자신의 시간이 사라지길 바라고 있다. 태생이 불분명한 이우와 판도는 섬 안에서 존재의 불안을 나눠 가진다. 서커스에서 곡예를 배우다 버려진 판도는 이삐 할머니와 살게 된다. 누구라도 판도 앞에서는 비밀과 고민을 털어놓는다. 이우와 판도는 손바닥에 글씨를 쓰면서 언어와 온기를 주고받는다.

  소금 창고에 도서관을 짓겠다는 정모의 미래는 다가올 어둠으로 들어찰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내일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천국이 도서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보르헤스의 전언은 정모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빛이다. 막막하고 막연한 삶의 절망을 등 뒤로 섬으로 들어온 태원의 시간조차도 섬에서는 쉽게 밝아지지 않는다. 실패한 사랑의 흔적을 섬 안에서 발견하는 핏빛의 시간, 태원이 선택하는 미래를 섬은 조용히 덮는다. 

  '지나고 보니 아픈 것도 낙이고 힘든 것도 낙이'라는 이삐 할머니의 두서없는 소리를 듣고 이우는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 앞에서조차 울지 못하고 병원을 돌면서 불면증을 약을 타 먹어야 했던 이우에게 이삐 할머니는 살아가는 것의 당위를 무심히 흘려준다. 정미경이 그려내는 인물들은 생의 불안을 온몸으로 껴안는다. 과거의 시간으로 촉발된 고통으로 그들의 오늘은 형편없음으로 쓰인다. 날짜는 지워지고 기억은 더욱 선명해진다. 견딜 수 없는 기억과 실패를 가진 그들이 선택하는 것은 사랑이다. 너덜너덜하고 얼룩이 잔뜩 묻어 있는 오래된 책 같은 사랑. 정미경이 마지막까지 쓰고자 했던 섬 안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 『당신의 아주 먼 섬』. 문장 한 줄을 종이에 쓰고 빈 화면으로 옮기는 지난한 작업을 했을 소설가 정미경의 작업실에서 발견한 『당신의 아주 먼 섬』. 

  그 안에는 이제는 누구의 입에서도 말하지 않는 사랑을 손바닥 위에 쓰고 웃음 짓는 사람들이 있다. 기억에서 자유로워진 그들은 바다 위에 도서관을 짓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그 겨울의 방에서 빛을 모으고 싶었던 나는 견딜 수 없는 죽음의 고통을 사랑으로 바꾸고 떠난 정미경의 소설에서 이 생을 살아야 할 뜨거움을 받아 들었다. 이별하지 않고 이 별에서 사랑을 나누겠다. 이름을 부르고 함께 했던 아프고 힘든 순간들을 떠올리는 것으로 삶을 밀고 나가겠다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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