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포토스의 배 - 제140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쓰무라 기쿠코 지음, 김선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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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세는 스물아홉 살로 로션 공장 라인에서 일한다. 어느 날 휴식 시간에 본 세계 일주 크루즈 여행 포스터에 마음을 뺏긴다. 163만 엔. 세계 일주에 드는 비용이다. 그날부터 나가세는 공장에서 받는 월급을 모두 모으기로 결심한다. 생활은 친구 가게에서 일해서 받는 돈과 컴퓨터 강사 일에서 받는 비용으로 충당하기로 한다. 전에 일하던 곳에서 힘든 일을 당해 겨우 공장에서 다정한 오카다 씨 덕분에 적응 중이다. 세계 일주 포스터를 보기 전에 그녀는 낡은 집을 수리하려고 돈을 모으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살지만 각자의 수입으로 생활을 유지한다. 친구들과 어색한 만남에서 돌아오는 길에 썼던 돈들을 정리하면서 하루치의 일당이 날아간 것에 속상해하기도 한다. 


  집에서 기르는 라임포토스는 물만 잘 갈아주면 별 탈 없이 잘 자란다. 세계 일주를 하기 위해 빠듯하게 돈을 모으면서 식비를 해결하기 위해 라임포토스를 먹어볼까도 생각한다. 친구 중에 리쓰코가 남편과의 불화 때문에 그녀의 낡은데 크기만 한 집으로 딸과 함께 들어온다. 에나라는 딸아이는 도감 보는 것을 좋아한다. 나가세는 친구 리쓰코가 신혼 초에 남편에게 맡겼던 저금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친구의 독립을 지지해주고 쉬는 날 없이 쉬는 날이어도 쉬어도 될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하지 않은 그녀에게 세계 일주에 가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이 생긴다. 그녀는 세계 일주를 떠나 파푸아뉴기니에 도착해 아우트리거 카누를 탈 수 있을까.


  나가세라는 이름에 나의 이름을 넣어도 무방하지 않을 이야기들.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다가도 나가세의 세계 일주를 응원한다. 쓰무라 기쿠코의 『라임포토스의 배』에 등장하는 주인공 나가세는 나의 이야기다. 월급 통장을 비우고 앞으로 일 년, 그 일 년 동안 다른 것들은 포기하고 오로지 돈만을 보고 시간을 버틴다. 다가올 일 년을 위해. 독립한 친구의 집에 찾아갈 때 차비가 걱정되어 자전거를 타고 갈까 생각하고 오로지 자신의 걱정은 생활에 관한 것일 뿐이라는 것에 한심해 한다. 


  비가 오면 비를 바라보고 휴일이 하루쯤은 생겨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편히 누워 천장을 바라볼 수 있는 일들을 꿈꾸는 것이다. 지금 벌지 않으면 어제는 관리비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매일 밥을 먹어야 하고 어두울 때는 불을 밝히고 더울 때는 에어컨을 틀고 겨울에는 가습기 정도 틀 수 있으려면 일해야 한다. 눈치도 보지 않고 책상 위에 엎드려 자는 동료를 보고 그 동료가 곧 결혼한다는 소식과 함께 일을 그만두는 걸 보는 걸 계속 지켜봐야 하는 것도 생활을 위해서다. 지난달에 연말이라 들뜬 마음에 생각 없이 긁은 카드 이용 내역을 훑어보다가 많이 썼다고 주는 포인트를 발견해서 왕 깍두기 2kg을 주문했다, 오예! 돈을 더 보태긴 했지만 왕 깍두기를 사서 신이 난다. 


  쓰무라 기쿠코의 소설을 읽으면 힘이 난다. 주인공들의 삶은 힘들고 희망은 전혀 보이지도 않는데 소설을 읽는 나는 힘이 난다. 세계 일주까지는 아니지만 일 년을 열심히 살 목표가 생기는 것이다. 작년에 얻어온 다이어리에 좋아하는 캐릭터 스티커를 붙이고 고정 지출들을 적었다. 보험료와 핸드폰비, 교통비, 가스비들을 적고 나자 숫자들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어제 그 사람이 했던 말은 잊어버려,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다음 달 월급 날짜를 생각해. 고마압다.


  『라임포토스의 배』에는 다른 소설도 한 편 더 있다. 쓰무라 기쿠코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는 「12월의 창가」는 회사에서 무차별적인 폭언과 스트레스를 겪는 쓰가와가 있다. 그녀는 인쇄 회사의 지사에서 일하고 있다. 본사가 아닌 지사라 회사 안에는 인근 고졸 출신의 여직원들이 대부분이다. 파견 근무까지 다녀온 그녀는 이미 관계가 형성돼 그 안으로 들어갈 자리는 없다. 상사도 그녀보다 나이가 어린 여성들이라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다. 혼자 점심을 먹고 휴식 시간에는 맞은편 도가노 타워 안을 바라보는 것으로 회사 생활을 보낸다. 일을 주지 않고 V 계장의 폭언에도 나서 주지 않는 선배와 동료들. 


  필름 한 장이 없어진 사실로 쓰가와를 몰아세우고 사무실 곳곳을 뒤지게 하는 V 계장. 쓰가와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녹아버리는 경험을 한다. 그녀가 12월의 창가에서 본 장면으로 이야기의 전개는 다른 방향으로 바뀐다. 마음까지는 아니지만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업무의 피로를 날려버릴 수도 없고 동료들의 이야기에 끼지도 못한다. 무언가를 얘기해도 표정 변화가 없는 선배. 자신의 잘못은 감추고 후배에게 떠넘기는 파렴치함까지. 생활을 위해서 매일 빠져나가는 숫자들을 위해 숨을 죽이고 죄송합니다를 주문처럼 말해야 한다. 


  나가세와 쓰가와의 내일을 조심스럽게 지지한다. 그녀들의 내일은 곧 나의 내일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만난 그녀들은 현실에서 만난 어떤 사람들보다 열심히 살면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라임포토스의 배 위에 올라 세계를 여행하고 꾸깃꾸깃 접은 사직서를 부장에게 건넨다. 최선이 아니라도 묵묵히. 오늘 쓴 돈을 적으면서 오늘의 이야기를 쓰고. 이 생에서 아쿠타가와상은 받을 수 없지만 캐릭터 스티커로 꾸민 노트북으로 책 이야기를 마음껏 쓸 수 있는 오늘이 있어서 알람이 울리기 전에 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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