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읽는 시
김남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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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던 여권을 꺼낸다. 알고 있다. 내가 가진 여권으로는 어디로든 갈 수 없다는 것을.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구한 기념으로 만든 여권이었다. 나 취직했어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기도 애매한 곳에 일자리를 얻고 마음이 허전했다. 생활비를 받을 수 있는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부랴부랴 구한 곳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해야 하는 곳. 교통비가 한 달 집세보다 많이 나왔다. 취업 기념 파티 대신 사진관에 들어가 사진을 찍고 시청에 가서 여권을 만들었다. 적금을 부어 여행을 가야지. 가장 긴 유효 기간을 가진 여권을 발급받았다. 

  기간 만료일로부터 일 년이 지났다. 십 년 동안 나는 아무 데도 가지 못했다. 가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고 싶지만 가지 못했다는 것이 맞다. 과감하게 일을 그만두고도 이불 속에 웅크리고 집 바깥을 나가지 않았다. 현실은 벅찼고 감당해야 할 미래의 일들이 나를 아둔하게 만들었다. 해야 할 말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벽에 붙은 세계 지도를 한동안 쳐다보곤 했다. 여행 가방을 꾸리고 비행기 표와 숙박 시설을 예약하는 나를 상상하기도 했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여행기를 읽었다. 그 책들 안에는 북반구의 오로라가 펼쳐지고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낯선 이방인과 나누는 대화가 실려 있었다. 도둑 맞을까 허벅지에 돈을 숨기고 국경을 지날 때 총을 찬 군인들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했던 순간들이 들어 있었다. 초점이 흔들린 풍경들을 바라보며 나는 열패감에 시달렸지만 글자로 그려지는 여행의 장면들을 상상하면서 일상을 견뎠다. 달은 늘 우리에게 같은 면만 보여준다. 지구인인 우리는 달의 뒷면을 목격할 수 없다. 달은 공전과 자전을 같이한다. 지구라는 별을 바라보며 달은 혼자 하루와 일 년을 돈다. 나는 달이다. 나는 묵묵히 내일을 바라보며 일하는 모습만을 보여주며 돌고 있다. 

  일 년을 일하지 않고 집에서만 지낸 적이 있다. 가까운 일본을 가볼까.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유럽으로 떠나볼까. 고민했지만 가지고 있는 돈을 아껴서 쉴 수 있을 때까지 쉬기로 했다. 낯선 곳에 가서 길을 헤맬 용기도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외로움을 맛볼 자신도 없었다. 책상 서랍 속에 숨겨둔 여권의 기한은 줄어들고 여행기는 쌓여 갔다. 국경을 넘는 게 생각보다 쉬웠다고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며 스스로를 반성했다는 여행기의 기록으로 떠나지 못하는 나를 다독였다. 

  여름휴가가 다가오면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 싶어서 그들의 대화에 끼고 싶어서 제주도로 놀러 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꺼낼 때 나는 제주도에 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항공사 사이트에 들어가 회원 가입을 하고 날짜에 맞추어 비행기 시각을 알아봤다. 제주도 지도를 신청했다.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다. 휴가 계획을 듣고 행선지를 이야기 하는 그 대화 속에서 함께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러 번 일을 옮겨 다니는 동안 나는 말수가 줄어들고 관계라는 것을 믿지 않게 되었다. 내가 한 말들과 행동들이 나를 향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상황들을 반복적으로 겪었다. 그때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면서 지냈다. 표정을 숨길 수 없어 화장실에 들어가 오래 앉아 있었다. 

  가장 가까운 이에게 제주도라도 가자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그 해 여름 집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새로 나온 책들을 읽은 것이 전부였다. 책은 그렇게 언제나 내 거짓말을 받아주고 허풍을 들어주었다. 가지 못한 길들이 책 안에서 펼쳐지는 것을 보며 나는 자유를 느꼈다. 물리적인 거리를 가늠하지 않아도 되고 시간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책 안의 길 위에서 나는 당신과 만날 수 있었다. 

  김남희의 책 『길 위에서 만나다』는 시가 우리 삶에서 어떤 화학 작용들을 불러오는지 생의 순간들마다 어떤 얼굴로 우리를 길 위로 데리고 가는지 알 수 있는 책이다. 시를 읽으며 작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길에 오를 때 작가의 여행 가방에는 시집이 들어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시와 편지들을 공책에 적어 보냈다. 지평선 밖에 볼 수 없는 길 위에서 모래바람 밖에는 느낄 수 없는 길 안에서 여행자는 시를 읽으며 이 별에서의 여행을 계속한다. 노래는 시가 되어 사랑이 남긴 이별의 고통을 잊게 해주고 혼자 먹는 밥상을 위로해준다. 내 방 여행자인 나는 상상한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순한 얼굴과 불면으로 뒤척일 지구 반대편에서 여행자가 느꼈을 고독의 무게를. 

  『길 위에서 만나다』는 특별한 여행기이다. 한 편의 시와 여행에서 느낀 생각들이 정갈한 언어로 쓰인 이 여행기는 지구라는 푸른 행성의 반짝임을 활자 속에서 느끼게 해준다. 시집에 밑줄을 긋고 마음에 닿는 문장들이 나오면 여백에 옮겨 적었다.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단어들이 나를 고통과 환희의 골목으로 데려가 주었다. 시를 이해하기 보다 오독했다. 시를 쓰기에 나는 지극히 산문적이고 모자랐다. 직관력 대신 지구력만 좋은 사람이었다. 

  허수경의 시 「혼자 가는 먼 집」을 읽으면 당신 이라는 말 다음에 나오는 킥킥 때문에, 시인의 출생지 진주 남강의 불빛을 걸으며 손을 잡았던 기억 때문에, 나는 환해진다.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어 나는 당신이라는 행성을 꾸준한 주기로 돌고 있다. 나의 앞면은 당신이 볼 수 있는 최대치이다. 그 앞면에 쓰인 나의 이야기를 당신이 읽어주길 바라면서 시를 읽고 습작을 했다. '그러나 킥킥 당신'은 나의 뒷면으로 다가온 유일한 탐사선이다. 뒷면에 쓰인 장황하고 비문으로 얼룩진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준다. '무를 수도 없는 참혹' 앞에 선 우리는 길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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