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김동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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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순간들을 압축적으로 정리하면 김동영의 신작 에세이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의 목차처럼 '살아간다, 떠난다, 돌아온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살고 떠나고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돌아오고 떠나고 살아간다로 순환된다. 삶의 모습은 세 가지의 말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지만 그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내면은 단순하지 않다. 매 순간 치열하고 복잡한 감정으로 생의 순간들을 마주 봐야 한다. 관계는 엉뚱한 곳에서 뒤틀리기도 하고 불안은 수시로 튀어나와 우리를 괴롭힌다.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내다가 긴장으로 묶인 끈이 풀리면 떠난다. 서랍에 넣어둔 여권을 챙기고 그동안 부었던 적금을 미련 없이 해약한다. 책상 앞에 붙여둔 세계지도를 물끄러미 보다가 비행기 표를 예약한다. 열어둔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햇살이 우리를 등 떠밀 때 떠나온다.


언젠가부터 나의 여행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이고, 조금 과장되게 의미를 부여한다면, 나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하는 '돋보기'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통해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렇게 여행은 나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충실하게 살아가기를 이행한 우리는 여행을 떠나면서 돋보기를 얻는다. 여행이 피난이든 도피로 불리든 우리는 그곳에서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가진다. 처음에는 많은 곳들을 돌아다닌다. 여행자의 모습으로 박물관과 미술관을 간다. 사람으로 가득한 곳에서 모나리자의 미소를 언뜻 보기도 하면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담고 얻으려고 한다. 카메라를 잃어버리는 것보다 그 안에 담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찍은 사진들 때문에 강도에게 맞서기도 하는 무모함을 여행지에서 보인다.
  어느 순간, 카메라로만 보던 풍경을 실제 눈으로 오래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서 무거운 카메라를 내려놓는다. 유명 관광지를 찾아가는 여행이 아닌 한 곳에 머무르면서 그곳의 풍경과 하나가 되어 있기로 마음이 바뀌는 것이다. 여행자이지만 어느 여행자의 카메라 안에서 우리는 풍경이 된다. 카페에 들어가 말하지 않아도 매일 먹는 메뉴를 가져다주는 호사를 누리고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한다.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 마한 질문을 던졌다가 이 여행이 끝나는 순간 생각해보겠다는 아름다운 대답을 듣기도 한다.
  나로부터 벗어나는 여행이 시작된다. 일상의 나와 여행에서의 나는 다르지 않다. 똑같은 모습의 나는 낯선 풍경이 주는 편안함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을 뿐이다. 버스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나가야 하는 조급함이 사라진 세계에서 햇살과 햇빛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날 위해 울어줄 사람이 누구인지를. 그들을 볼 때마다 늘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들을 생각하면 내가 지금까지는 잘 살아온 것 같아 마음 한구석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아이슬란드의 화산 폭발에 갇히고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과 변하지 않는 풍경으로 이어지는 길의 모습에서 돌아온 우리가 마주하는 건 다시 시작되는 살아가기다. 관계를 만들어가거나 이어가고 돌아온 집을 정리한다. 우편물을 받을 수 있는 최종 도착지가 있다는 것에 안도를 느낀다. 고양이들은 여전히 시큰둥하지만 산책길에서 혼자 앉아 있다가 마주한 녀석들은 돌아온 나를 반겨주는 것 같은 얼굴이다.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거야』 라는 책에서 시작한 십 년의 여행과 방황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 생선 작가는 우리에게 말한다,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괜찮아라고. 그 자신이 무엇이 되기를 열망했고 좌절했던 순간들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응원의 말을 해줄 수 있었다. 작가의 꿈을 이루고 타인이 보기에 자유로운 사람으로 보이는 자신이 서먹해지는 순간을 이야기한다. 십 년 전에 떠났던 미국의 그 길 위로 그는 다시 떠났고 돌아왔다.
  내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울어줄 누군가를 생각하는 일상을 사는 것으로 이 별에서의 여행기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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