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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평점 :
이상한 일이다. 한국 소설을 읽으면서 읽고 나면 책이 언제 출판되었는지 확인을 한다. 출판된 날과 책이 쓰이고 있는 시기는 다르겠지만 확인을 하고 나면 위로가 된다. 예전에는 그냥 읽었다. 읽고 잠깐 생각하거나 아무 생각 없었다. 뭐 그런 날들이었다. 뉴스는 잘 보지 않았다. 정신 건강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 속에 살고 있었다. 현실의 이야기는 들여다보지 않았으며 허구 속 세상으로 도피했다. 소설을 읽고 인물들의 생각과 상황들로 잠깐 현실의 나의 지금을 대입해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세상은 너무 빠르고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멍한 얼굴로 길을 걷고 있으면 남녀 둘이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곤 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두 여자가 나에게 팸플릿을 건네곤 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쉽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좋은 곳이 있으니 같이 가서 말씀을 듣자는 것이었다. 지친 영혼을 달래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좋은 곳이 있으면 댁들이나 가시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으로 거절의 뜻을 대신했다.
나는 남을 잘 믿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길을 걷는데 누군가 다가오면 무섭다. 길을 물어보는 사소한 일인데도 긴장을 한다. 여건이 된다면 누워서 밖에 나가지 않고 책 읽고 낮잠 자다가 일어나 밥 먹고 다시 자고 싶다. 택배 받느라 간간이 문이 열리고 바깥공기 잠깐 집으로 들여보내면 좋겠다. 나의 세계에는 심심하고 무료해서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영향을 끼칠 일이 없다, 고 믿는다.
『보건교사 안은영』을 신나게 읽었다. 읽다가 이런 문장을 만났다.
그날 보충수업이 있었던 아이들, 특히 옥상에 있었던 아이들은 뭔가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음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될 거 같았다. 인표는 학부모들이 항의해 올 경우, 강바람을 타고 강 건너 공간에서 환각 유발 물질이 날아온 것 같다고 변명할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학생들부터 잘도 믿어 주었다. 고등학생이면 벌써 다 큰 것 같지만 그래도 비이성적인 상황에서 어른들을 그만큼 잘 믿기도 힘들다. 믿지 말아야 할 어른들까지 철석같이 믿어 버린다. 아직 남아 있는 순수한 표정과 열려있는 눈동자가 선생님들을 버텨 내게 하는 힘이기도 했다.
산 사람이 풍기는 에로 에너지를 감지하고 죽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보건교사 안은영의 신기한 능력을 다룬 소설이라고 생각하며 읽다가 멈추었다. 멈추고 언제 책이 출판되었는지 봤다. 2015년 12월 7일. 숫자 몇 개가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가 스스로 신이 나서 썼는지 고행하면서 썼는지 예측이 될 때가 있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전자에 해당한다. 죽은 사람을 보고 산 사람에게 붙은 이상한 영혼을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으로 해치우는 안은영, 별명은 아는 형. 기괴한 것들을 본다고 해서 우울하거나 자신의 능력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산 사람들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죽은 영혼들을 장난감 칼로 흩뜨려 놓는다. 원어민 교사 메켄지가 학교에 들어와 정체불명의 씨앗을 심고 한문 선생 홍인표의 강력한 보호 기운을 가져가려고 하자 맨발로 뛰어와 그를 무찌른다.
놀이터에 가면 머리에 피가 고인 아이가 맨 먼저 달려와 안은영을 반긴다. 아이들은 서로를 재빠르게 파악해 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도 은영은 혼잣말을 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 아이로 통했다. 머리에 피가 고인 아이는 죽은 아이이고 은영이 다 커서도 아파트 놀이터에 가면 그 자리에 있다. 과자를 사서 그 아이가 먹게 한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혼자 지냈다. 김강선은 혼자 지내는 안은영과 짝꿍이다. 각자 문제적 시간을 지내면서 재수 없는 것들이 계속 앉으면서 서로의 결핍을 파악해 간다. 영혼 퇴치를 위해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이라는 그럴듯한 연장을 쥐여준 것도 김강선이었다. 아무 무기도 없이 앉아 있는 아이의 등을 털어내는 것보다 날아오는 불온한 영혼 덩어리 때문에 다치는 것보다 도구를 쓰면서 코믹 발랄로 장르를 바꾸라고 조언해 주는 것도 김강선이었다.
사립 학교 보건 선생으로 자리 잡은 뒤 학교에 굴러들어오는 불온한 영혼 덩어리를 퇴치하면서 한문 선생 홍인표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코믹 발랄 로맨스로 바뀐다. 짝사랑을 이어준다던가 전학생 혜민이 옴 잡이로 살지 않고 매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환생을 경험하지 않게 해준다. 학교 지하실에 묻혀 있는 짝사랑에 실패한 영혼을 풀어주고 인표가 잘못 만난 여자가 묻어둔 사악한 기운을 몰아낸다. 학교를 지켜주는 보건교사 안은영은 학교 아이들을 지켜주는 -아는 사람만 아는 그 아는 사람은 한문 선생 홍인표 뿐이지만- 아는 형으로 활약을 한다.
학교는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으로 이루어져있다. 언제가 떠나는 아이들은 잠깐 머물려 있는 장소로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긋지긋해 하기도 하고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여기며 모험을 감행하는 아이들도 있다. 교실에서 자는 아이들도 교실에서 혼자 있는 아이들도 보건교사 아는 형의 눈에는 지켜줘야 할 아이들이다.
작가의 말을 읽고 내 예상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정세랑은 이 소설을 오로지 자신의 쾌감을 위해 썼다고 한다. 작가가 신나게 쓰면 읽는 독자도 신난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재밌다. 한문 선생 홍인표의 보호막을 슬쩍 훔쳐 오고 싶고 영혼과 싸우는 안은영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허리 디스크를 때려주는 안은영. 나의 그 사람이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에너지를 풍기며 옆에 지내는지 바스러져 사라져 갔는지 물어 싶은 아는 형.
작가는 학교에서 어둡거나 복도 끝에 있는 보건실에서 약을 처방해주거나 아이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보건교사의 존재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는 추측을 해본다. 아는 형이라 불리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안은영 선생이 그 아이들에게 붙어 있던 죽음의 기운들을 비비탄 총으로 없애버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것. 배를 타기 전 홍인표 선생의 손을 잡고 빵 빵 총을 쏘면서 안개를 걷히고 불꽃놀이를 보며 좋아했을 뒷이야기를 숨겨 놓았을 것이라고 추리를 한다. 아이들은 그런 상황에서 방송에서 나오는 어른들의 말을 믿었다. 말 잘 듣고 착하다는 이유 때문에 돌아오지 못했다. 아는 형의 활약이 필요했고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