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1 - 김종광 장편소설
김종광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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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일기를 쓴다


  기록을 남긴다. 고대 동굴 벽화에도 인간은 그림을 그렸고 그들만의 문자를 남겼다. 사냥과 성공의 기원을 담은 그림을 남겼고 활 쏘는 모습과 춤추는 사람들을 그렸다. 역사는 기록과 사실로 남는다. 인간은 남기기 위해 살아간다. 불안한 오늘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염원을 각자의 자리에서 기록한다. 어떤 것은 일기가 되거나 사료로서 존재 가치를 가진다. 혹은 일기라고 쓴 것이 역사 기록으로 후대에게 남겨져 감동과 교훈을 만들어 낸다. 
  전쟁터의 참혹함 속에서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병사들을 걱정하고 적군의 동향을 살폈던 어느 장군의 일기는 후대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된다. 그는 자신이 쓰는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지 몰랐으나 기록으로 남아 우리는 과거를 소환할 수 있다. 독일인들을 피해 숨어 있던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생활과 초조함을 꼬박꼬박 써 나갔다. 그녀가 죽고 얼마 후 독일은 패망했고 남겨진 일기는 전쟁의 광기를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으로 남았다. 
  남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살아남을 수 없다. 슬프지만 자명한 사실이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오늘, 우리는 오늘의 일기를 쓴다. 2014년의 봄을 쓰고 2016년의 겨울을 남긴다. 여기 1763년 8월 3일 조일전쟁 후 떠난 11차 통신사의 기록이 있다. 5백 명으로 꾸려진 통신사 일행에는 온갖 계급의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정사부터 제술관, 격군까지. 신분을 막론한 사람들이 일본으로 떠나기 위해 배를 탔다.


이야기의 운명은 무엇인가


  전란이 끝나고 모내기 법과 상품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농민들은 부유해진다. 서민 문화가 발달을 하고 부농들은 자식을 서당과 향교로 보낸다. 한문과 한글을 익히면서 문화가 꽃피운다. 장터에서는 판소리와 탈놀이, 마당극이 펼쳐지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기수가 등장한다. 이야기를 짓는 작가들 역시 나타나면서 구비 문학은 기록으로 남는다. 중국의 소설들을 베껴서 색다르게 들려주고 짓는 작가가 있는 반면에 박지원은 양반임에도 양반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글을 짓는다.
  통신사 일행에 오른 변탁과 변박은 필명이 있는 작가였다. 그들은 배에 오르기 전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고 일본에 가서 보고 들은 것들 중 신기하고 기이한 것들을 글로 남길 것이라는 장담을 한다. 세책점 뒷마당에 모인 사람들은 그들이 쓸 작품에 투자를 한다. 소동 임취빈은 그 판에 등장해 자신 역시 이야기를 쓸 것이라고 말한다. 남의 나라 이야기를 짜집기 하는 작가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자신 역시 통신사 일행에 따라가는 자로서 이야기를 쓸 수 있으니 투자를 하라고 한다. 
  중국과 외국의 기행문은 한문으로 쓰면 번역이 잘 되지 않아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다, 언문으로 쓰되 쉽고 재미있게 읽힐 수 있는 여행기를 쓸 것이다고 말한다. 세책점 주인은 남자 오백 명이 일 년 동안 여행한 기록을 누가 읽고 싶겠냐며 통박을 준다. 임취빈이 쓰려는 이야기에는 임금도 반란 수괴도 위대한 정치인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읽었다. 일 년 동안 남자 오백 명이 일본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만나고 본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임취빈의 글쓰기는 작가 김종광의 『조선통신사』로 환생했다.


전주 방각본업계 쾌가 어음을 써주었다. "재능 있어 뵈는데 뭘. 꼭 써야 한다. 살해일왕 어쩌고 그건 접어두고 먼저 얘기한 거 말이다. 동고동락한 거. 네 진심이 절반만 발휘되어도 읽으만하지 않겠느냐?······원래 좋은 이야기는 많은 이에게 읽히지 않는 법이란다. 나라와 주군께 충성하고 어버이께 효도하자, 삼강하고 오륜 하자, 좋은 놈 잘되고 나쁜 놈 망한다, 사랑은 숭고하다, 이런 도덕 염불로 도배된 이야기나 팔리지. 진짜 이야기는 알아먹는 사람이나 알아먹는 것인지라 안 팔리는 게 당연하다. 자기계발, 처세술 책보다 안 팔리는 게 진짜 이야기야. 대중이 못 알아먹거든. 하지만 진짜 이야기도 필요한 법이란다. 너에게 희망을 건다."


  임취빈은 제문을 쓰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이야기는 완성된다. 김종광이 그려내는 마당극 같은 이야기판은 곳곳에서 벌어진다. 이름 없는 민초들이 아니라 양반이 멋대로 지워준 그들의 이름에도 한자를 달아준다. 그렇게 등장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원하게 펼쳐놓는다. 임취빈에게 어음을 써준 이가 한 말은 지금의 현실과도 통용된다.
  성공할 것이라는 자기 암시를 늘어놓는 책과 혼자 살아가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고 거짓 위로를 하는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올라가는 이 판국에 김종광의 『조선통신사』는 이야기란 어떤 운명인가를 우리에게 묻는다.
  거창한 걸 쓴 게 아니다. 몇 월 며칠, 어느 곳을 향해 가고 무엇을 먹고 사람들은 왜 죽어 갔으며 무엇을 봤는지 썼을 뿐이다. 그들의 기록이 남아 책이 되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들은 충실히 자신들의 하루를 기록했다. 갔다면 보고 보았다면 남겨라.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는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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