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논
폴 하딩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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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밤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누가 실려 가고 있는가. 밤의 장막 뒤에는 급작스런 죽음과 사고가 숨어 있다. 환한 대낮과 추운 계절을 열심히 살아 왔다가 불시에 덮쳐 오는 불안과 긴급 전화. 이 밤에서 그 밤 사이의 간극을 메우지 못하고 불면으로 새벽을 맞이한다. 집에 돌아오는 밤, 매일 병원의 불빛을 헤아린다. 10층 병실의 불은 몇 개나 켜져 있나. 다행히 어떤 날은 두세 군데씩 불이 꺼져 있다. 그 병실의 온기와 서먹함이 아직도 떠올라 입술을 깨문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들어가는 그 병실에서 11월을 보냈다. 그 밤의 전화를 받기까지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일상은 흔했고 죽음은 멀었다. 밤의 전화. 그 전화를 받는 순간 세계는 한쪽으로 기울었다. 
  『에논』의 주인공 찰리는 숲 속을 걷다 아내 수전의 전화를 받는다. 사흘 후면 중학교 3학년이 되는 외동딸 케이트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였다. 전화를 받고 나서 그는 사고를 낼 뻔했다. 여자가 다가와 당신이 애와 애 엄마를 칠 수도 있었다고 항의했다. 찰리는 딸이 죽었다고 말한다. 자신을 혼란스럽게 쳐다보는 여자의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딸을 화장하고 가족 묘지에 묻은 후에도 찰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벽에 손을 내리치고 수전과 그녀의 가족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수전에게 친정으로 가 있어도 괜찮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찰리는 혼자 지내기 시작한다. 살아 있을 때의 케이트의 건강한 모습과 아이와 나눴던 대화들을 떠올리며 진통제로 손의 통증을 달랜다. 
  약을 먹는 횟수를 늘리고 의사에게 약 처방을 더 받으면서 점점 약물에 빠진다. 집 안에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청소와 빨래, 목욕 같은 일상적인 행위가 불가능한 찰리는 오로지 약을 먹는 일에만 골몰한다. 케이트와 함께 갔던 호수를 따라 걷고 새의 모이를 주기 위해 팔을 펼치던 일들을 떠올린다. 가족 묘지에 가서 오랫동안 앉아 있기도 하고 케이트에게 자전거를 사줬던 일들을 회상한다. 찰리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에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시계 수리공이었던 할아버지 일을 도와주고 용돈을 받기도 했다. 에논의 자연과 풍경들을 온몸으로 받아들 이며 사랑하는 아이였다. 
  책을 좋아했으나 학교 성적은 형편없었고 간신히 들어간 주립 대학에서 수전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했다. 부유하지 않은 그는 페인트 칠과 잔디 깎는 일로 생활을 꾸려갔다. 그는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따뜻하고 깨끗한 집을 사고 사고 싶은 다정한 아빠였고 아이와 일찍 일어난 아침 신문을 보며 마당 장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길 좋아하는 다감한 아빠였다. 케이트는 그에게 사랑이고 세상의 온기이자 기쁨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만약 케이트와 수전이 그냥 위층에서 자고 있는 거라면? 내가 그저 화장실에 갔다가 물을 한 잔 마시려고 내려온 것일 수는 없는 걸까? 아니면 냉장고를 열고 닫히지 않게 옆구리로 막은 후 냉장고 불빛 속에서 톨하우스 쿠키 몇 개를 먹으며 우유를 통째로 들고 마신 다음, 부엌문에 달린 블라인드를 십여 센티 정도 젖히고 달빛에 잠긴 마당을 내다보면서 밖에 있는 모든 동물들, 숨어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는 동물들에 대해 잠깐 생각하다가, 좀 으스스한 기분이지만 약간은 위안도 느끼면서, 위층으로 올라가 케이트 방을 살짝 들여다보며 아이가 종종 그러듯 몸을 반쯤 침대 밖에 내놓은 채 자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한 후, 침실의 수전 옆자리에 누워 어쩌면 돈 걱정을 좀 할 수도 있고 아니면 한 시간 정도 일을 하다가 잠들 수는 없는 걸까? 얼마나 위안이 되는 일일까, 딸이 잠들어 있는 동안 돈 걱정을 한다는 것은.(60~61p)


  그 밤에 받은 전화는 나의 엄마가 간암 말기라는 것이었다. 사이렌을 울리며 대학병원으로 다시 국도를 타고 원래의 병원으로 오는 동안 허리를 잘 펼 수 없었다.  병원비와 응급차비를 말하는 엄마의 입술은 말라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의사는 우리가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했다. 과거의 일들 속에 잘못과 후회를 말하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서로를 그리워만 했지 잘못은 없었다. 엄마의 몸이 부풀고 의식은 흐려져 갔다. 엄마를 화장하고 돌아올 때 잠깐 비가 왔다. 울지 않았다. 잘 가라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우는 것으로 애도를 하고 싶지 않았다. 울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아팠다. 찰리는 케이트를 묻고 돌아와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그는 견딜 수 없는 그리움 때문에 자신을 다치게 한다. 약을 먹으면 보이면 케이트의 환영과 상상 속에서 살고 있을 케이트의 모습들 때문에 깊은 절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찰리는 케이트의 죽음으로 받은 보험금의 반을 수전에게 주고 남은 것으로 약을 사는데 쓴다. 예전의 동료 프랭키를 찾아내 비싼 값으로 약을 사고 돈이 떨어지자 이웃 사람들의 집에 몰래 들어가 약을 훔쳐 온다. 약을 먹고 에논의 호수와 습지, 길가를 걸으며 케이트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애도의 방식으로 케이트를 추억하고 그리워한다. 곧 있으면 고등학교에 가고 테니스부 주장으로도 학교생활을 했을 아이. 아이 앞에는 에논의 풍경만큼이나 밝고 다채로운 빛깔의 미래가 펼쳐져 있었다. 
  나와 엄마의 앞에는 유순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우리의 과거에서 우리의 잘못이 아닌 것으로 불화하는 동안 서로가 가진 마음을 다독여 주지 못해 아파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마트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과자를 보거나 사람들이 자신들의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때 길을 걷고 버스를 타고 하늘의 파람과 그 모든 시간과 날들에 엄마의 기억은 떠오르고 그럴 때마다 울지 않으려고 숨을 크게 쉰다. 
  케이트의 숨결과 그 아이의 웃음들. 가족 묘지에서 케이트 또래의 여자아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그 애들이 케이트는 좋은 아이였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헤일 부인이 케이트는 축복이었다는 말을 들으며 그 모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을 향한 목소리로 찰리는 약물에서 벗어난다. 가방에 돌을 짊어지고 강물로 들어갔던 찰리가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특별한 계기는 없다. 에논의 자연과 향기와 사람들의 걱정과 케이트와 함께 했었다는 기억과 다정한 추억으로 찰리는 살아간다. 낮의 일에 지친 그가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고 케이트의 꿈을 꾼다. 그와 케이트를 기억하는 이들이 사라져도 그는 케이트를 기억하는 일로 살아간다. 
  그 밤 당신의 숨이 끊어지고 당신이 심장이 멈췄음을 알려오는데도 당신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던 것은 당신 몸의 온기 때문이었다. 옷을 갈아입힐 때 당신의 등은 따뜻했고 나는 그 따뜻함을 나에게 느끼게 한 당신의 마지막으로 살아갈 것이라 다짐했다. 나의 손에 닿았던 당신의 체온으로 그 밤과 이 밤들을 지켜낼 수 있었다. 찰리의 무수한 밤들과 나의 밤들에는 추억으로 기억으로 꿈을 꿀 수 있는 온기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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