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는 입을 다무네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이경 씨는, 어떻게 보았어요?
앞뒤 자른 말이었지만 무슨 얘긴지는 알아먹었다.
온갖 보물이 들어 있는 다락방 같은 여자.
여혜는 이경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뭐 더 없냐는 듯.
영원한 동심, 우주만큼의 자유, 한낮의 무의식, 또······.
그런 뻔한 얘기 말고, 그냥 즉물적인 느낌을 얘기해 봐요.
듣고 보니 이경은 자신이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슬펐어요.
슬프다.······뭐가?
우리가 몸을 가졌다는 것, 마음도 가졌다는 것. 어딘가로 향해 매 순간 달려가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여혜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 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 그런




  하루에 아르바이트를 두어개씩 하고 정작 학교는 제대로 나가지도 못하는 이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해서 오늘 점심은 5천원을 넘지 않는 선에서 해결하는게 고민인 하루를 가진 이경. 그렇게 회사에 다니다가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앞으로도 계속 이런 삶이 펼쳐질 것 같은 예감에 부랴부랴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갔다. 저금해 둔 돈을 까 먹으며 일 년을 공부하는 그녀를 찾아온 친구는 이경이 원하는 대학을 써 둔 종이를 보고 큿 하고 웃었다.
  엄마는 이경을 할머니에게 맡겨 두고 집을 나갔다.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가 죽고 그 집에 월세를 받기 위해 친구와 산다. 출석이 모자라 학점이 엉망인 교양 과목 교수를 찾아가 부모도 없고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안되는 제 사정을 설명한다. 교수는 기말때 제출하는 영상 과제를 충실히 이행하면 깎인 점수가 만회된다는 팁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한다.
  자신을 좋아하는 현수에게서 받은 카메라를 가지고 이제는 노래를 하지 않고 은둔해 있는 가수 율을 찾아가 다큐멘터리 작업을 한다. 율은 말이 거의 없고 사회 생활을 하기 힘들 정도로 우울에 빠져 있다. 소설은 율이 꾸는 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를 다뤄 본적도 영상물을 제작해본 적도 없는 이경은 흔들리는 손떨림을 그대로 노출한 채 촬영을 한다. 율은 꿈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자신의 몸이 사라져가는 장면을 이야기 한다. 무대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그에게 목소리와 악보를 적을 손이 사라지는 꿈은 현실에서도 이어진다. 스스로 천재라고 자부하는 그의 음악은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지고 그가 재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멀다.
  이경이 찾아와 서툰 솜씨로 율의 자아를 깨우지만 그와 함께 살아가는 여혜는 그 두드림의 세기가 일정치 않다고 느낀다. 빔 벤더스의 다큐를 같이 본 후 여혜는 이경에게 감상을 묻는다. 사는 것 자체가 누군가 몰래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는 페이크 다큐 같은 삶을 살아내는 이경은 몸과 마음의 존재를 슬퍼한다. 
  작가 정미경의 마지막 작품이 된 『가수는 입을 다무네』의 줄거리를 따라가다보면 마주치는 삶의 황폐함과 불완전함 때문에 마음이 스산해진다. 작가는 암말기 선고를 받고 한 달이 지난 다음에 죽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을 거부하고 집으로 돌아와 가족 곁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아들의 결혼식에 가고 싶어 했으나 수척해진 얼굴을 화장으로도 가릴 수 없어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작가가 쓴 마지막 단편을 작년 가을 이맘때쯤 읽었다. 작가는 떠났지만 작품은 남았다.
  소설은 이경과 가수 율의 삶의 궤적을 연출 없는 다큐의 어조로 보여준다. 타자의 개입 없이 카메라로 찍는 흔들리고 거친 질감과 영상미를 가진 화면으로 삶을 그려낸다. 틀에 박힌 듯 억지 감동과 눈물을 짜내는 영화 같은 방식이 아니다. 이경에게 과제를 내준 교수는 영화를 찍어 오지 말라고 한다. 이경은 율과 인터뷰를 하며 그의 이야기를 찍는 한편 그녀를 버리고 떠난 엄마를 찾아간다. 엄마가 믿는 종교를 들추어 내고 행복 없는 신산한 일상을 거짓 없이 찍는다. 
  기형도의 시 제목을 가진 이 소설은 율이 노래를 하지 않게 된 것과 예술이 가지는 허상을 인물을 통해 그려낸다. 율의 부인 여혜는 더이상 노래 하지 않는 남편의 고통을 가만히 응시한다. 자신의 고통을 감춰두고 율의 침묵과 침잠을 곁에서 아파한다. 입을 다문 가수의 곁에서 감내하는 일상의 평범함을 그리워한다.
  예술이 우연에 기대어 유명해지는 것과 삶이 주는 무기력함을 작가 정미경은 담담하게 표현한다. 소설은 이경과 엄마의 일상적인 대화로 끝이 난다. 소설은 끝이 났고 결말은 지은 작가의 삶 역시 안타깝게도 마지막을 말하고 말았다. 생경한 것은 죽음이 아닌 삶 자체인지도 모른다. 죽었다는 것에 놀라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뜻밖의 일이 되어가는 시대. 작가 정미경의 명복을 빈다.



가수는 입을 다무네


걸어가면서도 나는 기억할 수 있네
그때 나의 노래 죄다 비극었으나
단순한 여자들은 나를 둘러쌌네
행복한 난투극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어리석었던 청춘을, 나는 욕하지 않으리

흰 김이 피어오르는 골목에 떠밀려
그는 갑자기 가랑비와 인파 속에 뒤섞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세월이 떠돌이를 법으로 몰아냈으니
너무 많은 거리가 내 마음을 운반했구나
그는 천천히 얇고 검은 입술을 다문다
가랑비는 조금씩 그의 머리카락을 적신다
한마디로 입구 없는 삶이었지만
모든 것을 취소하고 싶었던 시절도 아득했다
나를 괴롭힐 장면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모퉁이에서 그는 외투 깃을 만지작거린다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가 누구든 엄청난 추억을 나는 지불하리라
그는 걸음을 멈춘다, 어느새 다 젖었다
언제부턴가 내 얼굴은 까닭 없이 눈을 찌푸리고
내 마음은 고통에게서 조용히 버림받았으니
여보게, 삶은 떠돌이들을 한 군데 쓸어 담지 않는다. 그는
무슨 영화의 주제가처럼 가족도 없이 흘러온 것이다
그의 입술은 마른 가랑잎, 모든 깨달음은 뒤늦은 것이니
따라가보면 축축한 등뒤로 이런 웅얼거림도 들린다

어떠한 날씨도 이 거리를 바꾸지 못하리
검은 외투를 입은 중년 사내 혼자
가랑비와 인파 속을 걷고 있네
너무 먼 거리여서 표정은 알 수 없으나
강조된 것은 사내도 가랑비도 아니었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中에서,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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