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 세사르 바예호 시선집
세사르 바예호 지음, 고혜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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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오늘 나에게 물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이 오후에 그 아무것도 내게 청하지 않았습니다.
(아가페 중에서, 세사르 바예호)


  오늘 우리에게 쏟아진 파란 하늘의 햇살은 찬란했습니다. 미세먼지가 걷힌 가을 하늘에는 지나가는 새들의 운행이 있을 뿐 고요했습니다. 덥게 느껴지다가도 바람이 불어와 우리의 등을 식혀 주었습니다. 마음의 소리를 고요히 듣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버스에 앉아 열어둔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과 신호들에 잠깐 눈을 주기도 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어제 읽다가 덮어둔 한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책장이 넘어가는 동안 오전의 시간은 다급하게 지나갔습니다. 절판된 시집이 다시 나오는 시간은 이십 년이 걸렸습니다. 페루의 가난한 시인의 시들은 절박하고 따뜻하고 걱정으로 가득했습니다. 세사르 바예호의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에 담긴 마음들을 가만히 떠올려 봅니다. 
  시집에 실린 시의 계절은 가을입니다. 9월의 밤과 풍경들이 등장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추억하는 밤과 비가 내리는 오후가 우리를 시의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어떤가요. 시를 읽는 오전과 오후를 지나 밤으로 질주하는 하루를 갖고 싶지 않으신가요. 불안과 불확실한 추측으로 오해를 살까 전전긍긍하는 순간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가요. 곧 돌아올 것이라는 부모님의 말만을 믿으며 물기 어린 밤을 보낸 우리는 젊은 시인의 시에서 급작스럽게 호출된 기억으로 슬픔에 휩싸입니다. 그 유년은 덥고 지루한 오후만 남았습니다. 텔레비전이 꺼진 오후를 견디느라 축축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고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질문을 받지 못한 유년은 뒤틀린 책상 위 말라가는 선인장처럼 관심에서 멀어졌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형! 오늘 난 툇마루에 앉아 있어.
형이 여기 없으니까 너무 그리워.
이맘때면 장난을 쳤던 게 생각나. 엄마는
우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지. "아이구, 애들아···"
(나의 형 미겔에게-그의 죽음에 부쳐 중에서, 세사르 바예호)


  시인은 죽은 형을 기억합니다. 그와 살았던 유년을 잊지 못합니다. 가까운 이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은 시인이 시를 써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 냈습니다. 시인은 죽은 어머니를 시 속으로 불러냅니다. 어머니와 함께 지냈던 집에서 식탁에서 그곳에서 나눴던 대화와 장면을 시로 복원합니다. 시를 쓰는 것은 견디기 위함입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사소한 일에도 가슴이 뛰는 날,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혼자서 점심을 먹습니다. 어머니의 다정한 말을 떠올리지만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 역시 곁에 없습니다. 우리는 죽었습니다. 살아있다는 착각에 빠진 우리가 세계를 파괴합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소요를 만들어 냅니다. 
  체제와 이념이 다른 타인들이 서로를 향해 죽어라라고 외칩니다. 돈을 받으며 구호를 외치는 자들이 있고 명령을 받아 총을 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말[言]들이 죽어나가는 시대를 살아간 시인은 기록합니다. 내전의 참상과 죽어간 사람들의 얼굴을 그립니다. 고통은 우리를 살아가게 합니다. 이제 그립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순간마다 그립고 아픕니다. 죽어간 자들이 죽은 우리를 위로합니다. 죽음으로써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시인은 정리합니다. 은유와 상징은 없습니다. 숨은 의미를 추론하느라 바쁜 시를 배우는 시간에 시는 죽습니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습니다. 글자를 읽고 숨을 쉬고 책장을 넘깁니다. 오직 숨쉬기에만 집중합니다. 햇빛을 만지고 바람을 가방에 넣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한 사람이 죽은 전사에게 다가옵니다.
"죽지 마!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러나 죽는 사람은 그냥 죽어갑니다.
(XII. 대중 중에서, 세사르 바예호)


  그냥 죽습니다. 죽음의 장소에는 원인도 결과도 남지 않습니다. 숨이 끊어졌다고 했지만 아직 따뜻한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겨진 우리에게 이제 다정한 밥상도 소란스러운 휴일도 사라졌습니다. 시계를 쳐다보느라 바빠 허겁지겁 밥을 넘기는 노동의 시간이 길게 펼쳐집니다. 이 문장들은 비문일까요. 정확함과 완벽함을 따지는 세계는 모두 완전한가요. 완전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시대에 시를 쓰고 읽는 일은 논리적인 답변이 되지 못합니다. 의문스러운 죽음이 있고 자연스러운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냥 우리는 죽습니다. 
  현실에서 나는 나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꿈일 것이라고 말해보았지만 나는 죽어 있었습니다. 음악도 대화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눈을 감았습니다. 나무로 살아갈 것이라고 나직하게 읊조렸습니다. 신을 믿지 않는 나는 나를 사랑하는 단 한 사람에게로 갈 것입니다. 그늘을 내어주고 새들의 보금자리로 바람이 불어오면 잊지 않았다는 듯 잎들을 떨어뜨릴 것입니다. 단 한 사람의 시가 되어 머리맡에 놓일 것입니다. 이 모든 미래는 우리에게 펼쳐질 예정입니다. 


여름, 나 이제 가련다. 오후의 
부드러운 네 손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늙었구나.
그런데 내 영혼에서는 그 누구도 볼 수 없을 거다
(여름 중에서, 세사르 바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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