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 구직자 - 그리고 소설가 정수정의 화요일 다소 시리즈 5
정수정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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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기분이나 살아감이 그지 같을 땐(거지보다는 그지가 어울린다, 이 삶은) 돈을 좀 써야 한다. 내일이 돌아오는 것이 소름 끼치게 싫어서 내일을 기대할 무언갈 찾기 위해 쇼핑몰로 향했다. 설마 산이나 바다로 갔을 거라 기대한 건 아니겠지. 차가 없는 뚜벅이에게 허용된 기분 전환의 장소란 쇼핑몰이 전부이다. 새로 문을 열었다는 올리브 영을 기웃댔다. 딱히 살 것이 없는데 구경하다 보니 필요가 생겼다. 


딱 올리브 영에서 제품 두세 개 살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이 전부. 그렇게 소비로써 마음을 추스르는 건 좋지 않다고들 하지만(누가?) 어쨌든 돈을 좀 쓰니 가라앉은 기분의 깊이가 1 정도 올라왔다. 살 마음에도 없는 청바지를 입어본 건 이걸 사면 내일 입고 갈 생각에 마음이 괜찮아지겠지 해서. 밑단 수선을 기다리는 동안 서점에 갔다. 그럴 때가 있다. 내가 책을 선택한다기보다 책이 나를 선택하는 순간. 


정수정의 『연쇄 구직자』의 경우가 그랬다. 무얼 살까. 매대를 돌아보던 중 다산책방의 '다소 시리즈'가 있었다. 전에 송지현의 책을 구매해서 읽었는데 이 시리즈가 꾸준히 나오고 있었구나. 반가웠다. 그러다 『연쇄 구직자』를 보는 순간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었다. 딱 정확히 지금의 내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제목으로서. 어디 점이라도 보러 가서 이 사나운 팔자의 해석을 맡겨야 하나 싶었는데. 그렇게 책은 나를 이상하게 위로한다. 


충동적인 건 아니었다. 그동안 참을 만큼 참고 견딜 만큼 견뎠다. 이제는 못 하겠다. 참고 견디는 건. 『연쇄 구직자』에서 말하는 나다움을 나는 이곳에서 잃어가고 있었다. 그만하겠다 이야기하고 나는 다시 구직자의 신분으로 돌아갔다. 대놓고 무례한 사람과 숨 쉬듯이 무례한 사람. 일을 해도 일을 안 해도. 물어봐도 물어보지 않아도. 뒤의 말은 생략할까 하다가. 써본다. 지랄. 


『연쇄 구직자』를 틈틈이 읽으며 이력서를 전송했다. 연락은 간간이 왔고 하루의 시간을 내서 세 군데에 면접을 봤다. 왜 다들 그렇게 운전을 할 줄 아냐고 물어보는 건지. 순간 헷갈렸다. 내가 운전원에 지원을 했던가. 처음 면접을 본 곳에서는 차가 없지만 차를 구해서 출퇴근을 해보겠다는(이 무슨 허황된 쌉소리를 나는 맨정신으로 했단 말인가. 그만큼 취업이 간절했던 모양이지. 나 자신을 이해해 보려 한다.) 말을 했고 곧 후회했다. 이곳은 연휴가 끝나면 전화를 해야 한다. 죄송하지만 차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출근이 어렵겠다는. 


내가 『연쇄 구직자』를 읽으면서 마음이 울렁거렸던 건 지수의 구직 활동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나와 비슷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 더 큰 거. 지수의 기분. 지수가 느끼는 감정 상태. 정확히 내가 느꼈지만 표현하기 힘들어서 주저했던 마음의 상태를 지수가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수는 팀장의 (와 진짜. 팀장이란 인간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뭣 같을까.) 애착 인형이 되기를 포기하면서 직장을 그만둔다. 이후에 결혼을 한 여성으로서 구직활동을 끝없이 시도한다. 


점심값 4,000원을 지원해 주겠다며 생색을 내는 대표. 전화 면접에서 결혼 여부와 출산 계획을 묻고는 연락이 오지 않는 회사. 임금 단가를 후려치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줄 모르는 팀장.(명함을 카드 주듯이 밀어서 준다니. 현실 고증이겠지만 이런 인간이랑은 마주치기 싫네.) 지수가 구직 활동에서 만난 다양한 회사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이렇다고가 아닌 진짜 그렇지 하면서 울적해진다. 더한 걸 겪으면서 구직 활동을 하고 있는지라. 


그럼에도(그럼에도 라는 접속사가 꼭 필요하다. 나는 이 접속사가 좋다. 뒤에 올 말이 기대되니까. 그럼에도. 그럼에도.) 지수는 구직 활동을 한다. 지쳤지만 포기하고 싶지만. 거장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를 이 그지 같은 삶의 모토로 삼아야겠다. 연쇄 구직자로서의 지수는 그간에 내가 겪은 상황과 놀랄 만큼 비슷했다. 나 역시 지쳤고 포기하고 싶었지만 구직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는 곳마다. 눈물.


나를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면서 이쪽 일에 경험이 있는지(아. 눈새인 나도 느꼈다. 텃세의 기운이.) 묻고. 물 한 잔 주지 않고.(집으로 가는데 목이 너무 말랐다.) 압박 면접을 하려고 밑도 끝도 없는 상황극과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피해 금액을 물어야 하는데 얼마나 낼 수 있는지. 그걸 왜 내가. 하는 기분으로. 되는대로 말했다. 아마 연락 안 오겠지.) 정말 가지가지 한다. 한 달에 세금 공제하고 200만 원도 안 줄 거면서. 제일 중요한 급여 먼저 말해달라. 달라. 달라. 


지수의 구직 활동은 어떻게 될까. 나는 이제 지쳐서 알바천국도 열심히 기웃거린다. (지쳤는데 열심히 기웃거린다니 나란 사람은 모순 덩어리다.) 아직도 얼굴 피부병이 낫질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말해 뭐해. 가족 같은 회사에서 아들이라는 작자가 실장이라는 직함으로 내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는 겁나 스트레스 받으면서 일하니까 그런 거겠지. 피부과 약을 거진 두 달 넘게 먹는데도 차도가 없는 내 얼굴을 본 의사는 의아해했다. 이 정도면 나아야 하는데 하면서 레이저 치료 예약을 잡아 주었다. (이제 새벽부터 나가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이걸 좋아하는 게 맞나. 그래도 좋다.) 


『연쇄 구직자』의 주인공의 이름은 최지수인데 내 이름을 붙여 가면서 읽었다. 바느질을 배우면서 칭찬을 받아 기뻐하는 지수. 돈도 들지 않는 칭찬의 말을 사람들은 알뜰하게 아낀다. 뭐든지 열심히 하는 지수. 어떻게든 살아나가려는 지수. 연쇄 구직자 지수. 널 많이 아끼고 사랑해, 지수. 뭐가 되려고 하지 말고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자, 지수. 


2026년이 끝나지 않았지만 2026년에 읽은 책 중 최고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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