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 올리브에게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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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필요했다. 피곤하고 어두운 지금을 잊을 수 있는. 


여백이 필요했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글자들이 아닌 여백이. 


몇 주 전에 사 둔 책이 떠올랐다. 읽으려는 의욕이 앞선 시기에 산 책. 지금은 읽고 싶어도 그저 눈으로만 책이 거기 있다는 걸 아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이야기와 여백이 필요하므로 그 책을 읽으면 되겠다 싶었다. 잠이 쏟아졌지만 책장을 펼치면 손 글씨와 우표가 붙어 있는 책을 소중하게 꼬옥 안았다. 옆으로 휘어진 나무와 그 아래 의자가 있는 장을 넘기면 개 한 마리가 따라오라는 듯한 그림이 나온다. 


녀석의 바람대로 그림과 이야기 속으로 따라 걸어간다. 루리의 『나나 올리브에게』는 이렇게 시작한다. 손 글씨와 우표, 알록달록한 그림은 나만을 위해 준비한 유일무이한 책인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착각이어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나에게 와서. 지친 내가 시간을 얻어서 『나나 올리브에게』를 읽을 수 있어서. 이런 경험은 다정하다. 


그 집에 가면 휘어진 올리브 나무가 있고 나무 이름을 딴 나나 올리브가 살고 있다고 한다. 정확한 위치나 주소도 알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그곳에 가보았고 나나 올리브와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죽음의 문턱에 있던 사람에게는 눈 주변이 까만 개 한 마리가 올리브 나무 집으로 이끌고 갔다. 그렇게 사람들은 지쳐 있거나 죽음의 순간에서 올리브 나무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배경을 생각해 보았다. 공간적, 시간적 배경 말이다. 어느 때일까 어느 장소일까. 책을 읽어갈수록 그런 걸 생각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나 올리브에게』의 배경은 지금 여기를 말하고 있다. 전쟁으로 사람들은 여전히 죽거나 다치고 고통받고 있으니까. 배경을 굳이 따지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기억 속 올리브 집을 떠올리며 잊고 있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리스는 여행을 시작한다. 어린 시절 그곳에서 잠시 머무르며 상처와 아픔을 치유한 적이 있었기에 지금이라는 놀라운 시간을 살 수 있었다. 올리브 나무 집에서 만난 군인 월터에게 연락을 취한다. 그는 암이 발병해 항암 치료 시작 전이다. 기억 만으로 그 집을 찾을 수 있을까. 


다리스는 올리브 나무 집을 찾아낸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한 시절을 보낸 기억은 진짜였다. 집은 폐허가 되었지만 몇 군데는 놀랄 정도로 깨끗했다. 나나에게로 시작하는 편지가 담긴 노트 한 권을 발견한다. 『나나 올리브에게』는 나나 올리브에게로 보내는 편지가 대부분 주를 이룬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당신의 코흘리개'로만 자신을 밝히는 이가 그리운 마음을 담아 나나에게 편지를 쓴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면서까지 『나나 올리브에게』를 읽으며 지나가 버린 시절을 생각했다. 지나갔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 대해서 말이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의 마음이다. 그럼에도 지나가 버린 그 시간이 있어서 지금 여기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잊어버려도 되고 기억해도 된다. 살아가다 문득 그때를 떠올리는 건 힘을 얻기 위해서이다.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힘. 


언젠가는 끝이 날 편지를 써보려고 한다. 나나에게. 나나는 모든 이름이 될 수 있다. 마음이 아파 부르지 못할 이름에 나나를 대입해서 그리움을 마음껏 드러내면 상처받아도 곧 아물 수 있을 것 같다. 내일 보다 더 먼 날을 상상하는 것. 『나나 올리브에게』를 읽으며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조심스럽지만 일 년 후와 이년 후와 그 이후의 날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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