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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함
예소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평점 :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영화 《미키 17》을 보고 나오면서는 마음이 어수선했다. 두 시간이 넘는 영화는 지루하지도 재미없지도 않았는데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알았다. 《미키 17》은 좋은 영화구나. 처음으로 봉 감독이 사랑 영화를 찍었구나. SF 장르를 빌려와서. 다시 보고 싶은 영화다. 그때는 못 느꼈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니 영화의 모든 장면이 사랑스럽게 다가온다. 2054년이 되어도 우리는 근로소득으로만 돈을 벌어야 하지만 사랑은 남아 있겠다.
예소연의 『사랑과 결함』에 담긴 열 편의 소설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읽고 나면 어딘가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인물들이 겪어내고 살아내는 이야기에 나의 시간을 대입해 보다가 쓸쓸하고 종내에는 지쳐 버렸다. 이불을 덮고 한참이나 천장을 보고 있다가 깨닫는다. 사랑을 그리고 있구나. 임신 중단 수술을 한다고 이백만 원을 빌려 가놓고 유럽 여행이나 가는 정선이를 찾으러 가는 이야기에도 사랑이 있구나.
「우리 철봉 하자」를 읽고 쉽게 다음 소설로 넘어갈 줄 알았는데 책을 덮고 손을 가슴에 모은 채로 누워 있었다. 어서 힘을 내야 하는데 도저히 힘이 나지 않는다. 요즘에 나는 그렇다. 힘을 내라고 내가 나에게 계속 말한다. 일어나. 힘을 내. 걸어. 움직여. 전화를 걸거나 받아. 클릭하고 타자를 쳐. 명령조로 감정 없는 조교처럼 군다. 그러다 누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높이면 화를 내는 식.
『사랑과 결함』에 나오는 인물들에게 화를 내보면 어떨까. 어차피 그 애들은 내 말을 들어주기만 할 거잖아. 맹지와 석주, 미정이, 해나, 수민이, 미리내, 정선이들에게 나의 고민을 듣게 하자. 감정 쓰레기통. 미안해. 그렇게 생각했어. 너희들을 나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생각했어. 어쩔 수 없다. 그래놓고 현실의 다른 이들에게 나의 쓸쓸함과 걱정과 후회를 늘어놓고 말았다.
「그 개와 혁명」에서는 달라진다. 죽어가는 아빠를 태수 씨라고 이름으로 부르는 수민이는 다르다. 내가 이렇게 징징대면 태수 씨의 지령을 들려줄 것 같다. 동지, 우리는 혁명을 해야 해. 그만 울고 일어나서 돈 벌어.라면서. '죽음을 도모하면서 삶을 버티는 행위' 와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드'는 일은 죽음의 과정이다. 상갓집에서 난리를 치는 유자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태수 씨의 명복을 빈다.
잠깐 놀다가 들어갈게. 삶은 그런 것이 아닐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어서 와, 죽음은 처음이지. 하나도 무섭지 않아. 그동안 고생 많았어. 대출 이자 꼬박꼬박 내고 세금도 밀리지 않느라. 우느라 힘들고 머리도 아팠겠지만 여기서는 그런 거 하나도 없다. 너의 사랑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남긴 거 없이 잘 정리하고 왔지?
예소연이 그려내는 2025년의 시간은 미키가 죽음을 직업으로 삼는 2054년이 다르지 않아서 속이 상한다. 몇 시간 후에는 다른 마음이 밀려오지만. 사랑이 남는데 그건 이상한 사랑이 남아서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의 언어로 번역해 주는 번역기가 미래에는 개발될 테니 죽지 말고 오늘 말고 내일을 살아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