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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
송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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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책을 읽었다. 처음으로 오랫동안 바다를 마주했다. 내 기억 속 바다는 구정물이었다. 쓰레기가 파도에 밀려와 백사장에 깔려 있었다. 가까이 가기 싫어서 멀찌감치 서서 일별했다. 당연히 그 바다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발을 담그면 나의 생애가 잠겨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눈치 보지 않고 눈치 볼 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연차휴가를 붙였다. 그래도 아무도 누가 내게 뭐라고 말하는 이가 없다는 사실에 잠깐 놀랐다. 나 너무 눈치만 보며 살았잖아. 바다를 보러 가자. 동해의 푸른 바다를 만나러 가보자. 송지현의 에세이 『동해 생활』의 영향이 살짝 있었다. 소설가의 소설은 안 읽고 에세이 먼저 읽다니. 좋잖아.
동해로 이사를 가고 생활에 필요한 약간의 돈을 벌면서 친구들이 놀러 오면 방을 내어주고 해수욕을 한다. 저녁에 술은 덤덤덤. 또 아주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언덕은 여전히 가파르구나. 한국소설 코너에서 오래 머물다가 읽고 싶었던 책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를 발견했다. 그치. 나 이 책 읽고 싶었지. 『동해 생활』을 읽었으니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를 읽어야지 했었지.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에 실린 아홉 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눈에 담아온 동해 바다의 푸르고 거친 파도가 배경으로 떠올랐다. 작가의 말에서 송지현은 동해에서 월화는 카페에서 일하고 목금토일은 이마트 시식코너에서 일한다고 밝힌다. 소설가의 삶. 소설을 쓰기 위한 삶에는 직업이 필요하다는 것. 자기만의 방을 넘어서 자기만의 집이 필수이며 돈은 당연히 있어야 되는 것.
소설집에 실린 아홉 편의 소설이 전부 좋다니,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의 감상이다. 이럴 수가. '언니가 집 안에 있는 모든 약을 먹은 건, 여름이 끝날 무렵이었다.'라는 다소 경박한 호기심을 드러내도 괜찮을 것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선인장이 자라는 일요일들」부터 돈이 되지 않을 의뢰만 들어오니 그 일만 하는 탐정 사무소의 사계절을 담은 「탐정과 오소리의 사건 일지」 시리즈까지.
송지현의 소설은 송지현의 문장은 송지현의 세계는 너의 삶이 그렇게 힘들단 말이지? 그렇다면 나는 좀 더 다정하고 쉬워질 거야 하며 손을 내민다. 그 손을 나는 덥석 잡는다. 잡고 송지현으로 들어간다. 좀비가 되어도 일을 하러 다니고 사우나에서 만난 이모들과 여행을 가고 애인과 이별해도 다시 집에 돌아와 살아간다. 망해가는 대여점에서 일을 해도 오늘 정도는 긍정한다. 내일은 모르겠고!
바다 정도는 보이는 곳에서 살수 있잖아. 노랗게 바랜 벽지를 보면서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창문을 열면 하얀 포말을 그리며 달려들다가 멀어지는 파도를 배경으로 책을 읽다가 던져두었다가 다시 읽으면서. 이를테면 프롤로그의 방식으로 내 삶의 판을 다시 짤 수도 있다고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는 속삭인다. 바다가 보이는 집을 얻기 위해 망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한 번 망했다가 새로 괜찮아지기도 하더라고. 그런게 삶이라고 꼰대처럼 말하기는 싫고 눈치만 보지 말자고 잔소리는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