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맛
최유안 지음 / 민음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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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학교를 졸업했다는 새로운 후배는 열의에 넘쳤다. 가끔 퇴근을 할 때 나를 데려다주겠다고 하거나, 회사 앞에서 맥주를 한잔하자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그의 제안을 대부분 거절했다. 회사 안에서도 업무 얘기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와 말을 거의 섞지 않았다. 원칙을 지키라는 말도, 지키지 말란 말도 하지 않았다. 지각을 해도, 일찍 와도, 늦게 가도, 아무런 조언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씩 더 무기력해졌고, 가끔 실없이 웃었다. 

(최유안, 「보통맛」中에서, 『보통맛』)



최유안의 단편소설 「보통맛」의 나온 저 문단을 읽고 정확히 마지막 문장을 읽고 '웃었다.' 웃으라고 쓴 문장이 아님에도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웃었다.' 요즘엔 그렇다. 그냥 웃는다. 웃음 기계가 된 것처럼.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실수를 하거나 어이가 없거나, 그런 상황에 웃는다. 죄송하고 민망한데도 웃는다. 상대는 나의 웃음으로 열받을 수도 있지만 웃는다. 웃음으로 때운다. 


하하하, 크크크. 또는 크하하하.


「보통맛」을 두 번 읽었다. 요즘 같이 바쁜 시대에 집중력 부족과 도파민 중독 시대에 한 소설을 두 번이나 읽는 일이 흔할까. 한 번은 일하러 가기 전에 조금씩. 다른 한 번은 일 마치고 한 번에. 읽을 때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상황과 감정에 과몰입하는 나를 발견한다. 고은양이 아닌 「보통맛」의 '나'에게 애틋하고 서글픈 감정을 느끼는 나는 나이를 꽤나 먹어 버렸다. 그러니까 꼰대가 되어 버린 것이었던 것이다. 


말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말하지 않는 쪽으로. 알려줄까 말까 할 때는 알려주지 않는 쪽으로. 지적해야 될까 말까 할 때는 지적하지 않는 쪽으로. 결국은 꾹 참고 있는 것으로 나를 지켜내야 한다. 차분하고 단아한 사극에 나오는 강단 있는 여인상의 모습으로 말이다. 꿀팁 하나 공유 하자면 심호흡을 하고 집에 가서 먹을 간식을 떠올려 보시라. 


「보통맛」이 실린 소설집 『보통맛』에서 최유안은 타인을 향한 미안한 마음들을 풀어 놓는다. 곤경에 처한 그 사람에게 내가 좀 더 다가갔더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소설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일어날 일은 결국에 일어난다. 삶은 잘 짜인 구성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소설, 영화, 드라마처럼 납득할 만한 인과 관계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자책하겠지만 그냥 그렇게 되어버렸다. 


월요일 오전에 회사에서 예능 클립 영상을 보는 후배와 일을 하는 것도 난민 수용소에서 만난 소녀를 데려오지 못한 것도 불법 영상에 나온 인턴을 도와주지 못한 것도 나의 잘못이라고 탓을 해야 안심이 되겠지만 『보통맛』의 세계에서는 그럴 필요 없다고 어깨를 다독인다. 무조건적인 지지를 이 세계에서는 받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 『보통맛』의 세계로 가볼 것을 추천한다. 


안전하지는 않지만 묘하게 안심이 된다. 치사하게 생각하는 내가 정의롭지 못한 내가 『보통맛』에서라면 밉지 않을 수 있다. 현실에서 나는 내가 미운데 『보통맛』에서 나는 나를 좋아해 줄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래서 「보통맛」을 두 번 읽었다. 실패와 좌절의 정서가 난무하는 『보통맛』인데 변태인 건지 나는 용기를 받았다. 넌 너를 믿고 내일이 아닌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해. 하는. 


가끔 실없이 웃게 되어도 앞 집 여자의 오지랖에 진절머리가 나도 내가 나이게 살아야 한다. 인사 잘하고 상냥하게 말하고 글로 배워서 익힌 사회성을 발휘하고 월급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매운맛, 쓴맛의 꾸지람을 들어도 보통맛으로 치환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그날까지 당신과 나의 근로 생활을 응원한다. 언제 어디서든 냥냥 펀치를 꺼낼 수 있는 우리들이다, 조심해. 맞으면 멍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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