쿄코와 쿄지
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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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고 계신지요? 제가 쓴 편지를 읽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 이 편지를 씁니다. 시간이, 있겠지요. 편지를 쓰고 읽을 수 있는 시간쯤은 마련해 놓고 살았으면 합니다. 나도 당신도. 올겨울에는 비가 많이도 내렸습니다. 비가 얼마나 많이 내렸냐면 제가 일하는 곳의 누수가 발생했어요. 지붕이 삭아서 그런 것이라고 애초에 공사를 잘못 지은 것이라고 수리공은 말했습니다. 


CCTV의 구멍 아래로 떨어지는 빗물에 복사기가 흥건히 젖었습니다. 일찍 출근을 하여 물을 닦아냈습니다. 복사기야 미안해. 물을 맞게 해서. 다행히 전기 쪽은 이상이 없었고 곧 지붕 수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곳은 어떤지요? 어느 계절을 지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여기도 겨울이면 그곳도 겨울입니까. 아니면 남반구의 계절처럼 반대입니까. 소식 전해주세요. 


묵직한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한정현의 소설집 『쿄코와 쿄지』에는 당신의 어느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들이 가득했습니다. 열 편의 소설은 열 사람의 얼굴이기도 합니다. 모두 다른 얼굴이지만 모두 같은 얼굴이기도 한. 슬프거나 기쁘거나 맑거나 흐리거나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힘들고 아프고 어두운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떠오르던 기억들 때문에 자주 멈칫해야 했습니다. 그저 살아갔을 뿐인데 역사의 한 장면을 지나온 사람들의 이야기 때문이었습니다. 소설 속에서 호명하는 역사 4·3의 시간과 5·18과 부마항쟁의 시간들은 어쩌면 자주 바쁘고 정신 없는 탓에 쉽게 잊곤 했습니다. 혐오의 시절 또한 마찬가지이지요. 규명 되지 않은 진실을 묻어두고 지금은 혐오의 시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잘못이라고 말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쿄코와 쿄지』의 소설들은 앞으로의 사명은 포용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럴 수 있어를 넘어 그것 또한 괜찮다고 알려줍니다. 옳고 그름이 아닌 이해와 받아들임의 세계로 데려가 줍니다. 뜬장에서 구조해온 자자의 이야기를 읽고는 길에 누워 있는 고양이의 모습이 다르게 다가옵니다.


무섭고 피해야 할 것이 아닌 쉬고 있는 중이니 내가 조심히 걸어갈게,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중입니다. 소설은 문학은 이토록 다정하고 귀함의 감정을 선사해 줍니다. 그런 날이 있습니다. 마음이 뾰족해지는 날. 농담으로 흘려들으면 되는 말인데도 가슴에 오래 꽂아둡니다. 어떻게 극복했냐고요. 『쿄코와 쿄지』의 한 장면. 좋은 나도 나쁜 나도 아닌 그저 나로서 살아가리라 다짐하는 장면을 담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어떤 나로 비치는 걸 신경 쓰기 보다 나로서 살아가기. 계절에는 제철 과일을 마음껏 먹고 덜 아픈 언어로 말하며 살아가기. 사랑은 나를 보살피면서 당신에게로 완성됩니다. 망설임 없이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는 수리공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오후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두려움 없이 나를 업고 철길을 건너던. 죽기 전에도 죽음 후에도 사랑이 거기 있었습니다. 그토록 오래 사랑이 있는 나로 나는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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