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정아은 지음 / 천년의상상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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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추석 연휴는 6일이었다. 6일을 쉬면서 한 가지 깨달았다. 아, 나는 노는 걸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이었구나. 정말 정말 노는 걸 잘하는 사람이었구나. 무얼 하면서 놀았냐면. 책을 많이 읽었다. 하루에 한 권은 읽었다. 그리고 누워 있었다. 누워서 유튜브를 봤다. 내 마음 나도 모르지만 유튜브 선생은 내 마음을 알기에 정리 영상을 띄워주셨다. 


그때부터 홀린 듯이 정리 영상을 봤다. 집이 좁고 넓음에 상관없이 물건을 적재하고 배치하는 놀라운 기술을 보여주셨다. 소개 영상의 주인공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그들은 혼란한 집에서 물건들을 이끄는 장군이자 사령관이었다. 재활용품을 사용한 정리에서부터 다이소에서 산 수납 도구들로 집을 깨끗하고 보기 좋게 꾸몄다. 


청소는 어찌어찌하지만 요리를 한다기보다 조리에 가깝게 하기에 부엌 살림은 꼴등. 일어나서 부엌을 정리했다.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부엌에는 살림이라고 할만한 게 없었다. 무얼 해 먹어야지 도구들도 있을 텐데. 필요 없는 몇 가지 일회용품을 버리는 걸로 끝. 다음은 옷 정리. 옷은 정리가 필요했다. 일 년 사이에 입지 않은 옷은 과감히 버렸다. 추억이 있는 옷도 있었는데 추억은 옷이 아닌 기억에 보존되어 있다는 걸 자각하고 정리했다.  


소설가 정아은의 산문집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은 집에서 6일을 쉬고 있는 나에게 딱 맞춤한 책이었다. 누구도 나에게 비난이나 충고를 하지 않는다. 추석 연휴 6일이 아니라 그냥 쉬고 있어도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누군가의 일하지 않고 놀고 있다는 비난의 환청을 동력 삼아 살고 있다. 일하지 않고 쉬고 있다=집에서 놀고 있다의 공식은 어떻게 성립이 되었을까.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는 아이 양육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소설가 정아은이 집에서는 놀 수 없음을 다양한 책의 예시와 사례를 통해 역설한다.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를 읽고 인용된 책 몇 권을 주문했다. 절판된 책도 있어서 중고 서적으로도. 그만큼 책은 집에서의 노동의 가치가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폄하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각각의 챕터는 집에서 놀고 있다는 오해를 받고 있는 정아은이 겪은 예시로 시작한다. 큰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 정아은은 회사를 그만둔다. 누구도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지 않았지만 아이 있는 여성의 회사 생활은 불편한 마음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회식 자리에 있으면 여성에게 돌아오는 질문은 애는 누가 보냐는 것. 남성에게는 묻지 않잖아. 그렇게 회사를 그만둔 어느 날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야. 정아은. 너 요즘 집에서 논다며?"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는 친구의 질문으로부터 출발한 책이다. 순간 어떤 마음이었는지 모르지만 한참 후에 당황했고 불쾌했다는 느낌이 남았다. 남자는 사회 활동 여자는 집안 활동. 역할이 정해진 기원을 찾아 나선다. 어떻게? 책을 읽으면서. 『유한계급론』으로 시작해서 『여자에게 일이란 무엇인가』, 『잠깐 애덤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보이지 않는 가슴』. 책을 통해 알아낸 사실은 자본주의를 구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여성을 집안에 가두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랬구나. 그랬던 것이었구나. 기업은 재화를 만들어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다. 생물학적으로 힘이 좋은 남성의 노동력. 남성이 일을 할 수 있게 하려면 집에서 누군가는 남성의 먹을 것, 입을 것을 제공해야 했다. 제공자는 여성이어야 했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수익을 만들어내지 않는 일에는 논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의미 없다는 프레임을 씌웠다. 가사 노동이 대표적인 예였다.


정리 영상에는 여성만 나오지 않았다. 일을 하고 돌아온 남성도 정리를 하고 살림을 하는 에피소드도 간혹 있었다. 비율이 왜 그랬을까. 신청자가 적었을까. 같은 가사노동에서 여성이 하면 당연하고 남성이 하면 대단하다는 식의 시선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6일을 쉬면서 내가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구나 깨달았다고 했지만 6일 동안 놀지 많은 않았다. 집에서는 놀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집이다. 청소, 빨래, 정리 정돈, 가구 배치, 물건 상태 점검 등.


내가 집에서 일을 하기에 당신들이 사회에서 일을 할 수 있다. 이것만 알면 가사와 육아 노동을 가치 없음의 상태로 인식하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또 배운다.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에서 보여준 『자본론』을 읽기 위해 강의를 듣는 행동은 실천해 보고 싶다.  '뭐든지 해내려면 돈부터 집어넣어야 한다는' 인생 선배님의 조언을 잊지 않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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