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창비청소년문학 122
이희영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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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을이다. 라는 문장을 쓰기까지 참 많이도 힘들었지. 무더웠지. 그래도 아직 여름이라는 애는 고집쟁이라서 미련쟁이라서 문 앞에 서성이고 있어. 이제 정말 떠나도 되는 걸까. 자꾸 물어보면서. 짧은 옷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언덕을 오르고 내려갈 때는 아직 땀이 나는 10월의 어느 날에 쓴다. 우주를 떠도는 어떤 전파에 가닿을까 주파수를 이리저리 맞춰가며. 우연에 기댄다. 꼭 닿지 않아도 괜찮을 마음을 차곡차곡 담는 일도 좋아.


목소리가 아쉽다. 통화 녹음 기능이 있는 휴대전화를 그때는 왜 쓰지 않았을까. 지금이야 자동 녹음 설정을 해 놓아서 고객센터에서 걸러오는 전화도 녹음이 되는데. 내 이름을 부르는 힘이 없는 목소리. 이런저런 얘기 끝에는 이번에 얼마를 보내니 반찬과 과일을 사 먹으라는 당부가 있었다. 한글을 몰라 나에게 편지나 메모를 써주지도 못했지. 그래도 기억하고 있다. 전화부 수첩에 쓰인 자음과 모음이 불균형해서 이상하게 커진 글씨가. 


이희영의 장편소설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에서 엄마는 죽은 형의 동영상, 사진, 메일, 메시지를 모은다. 열여덟 짧게 살다간 아들의 흩어진 흔적을 하나로 모은다. 가상 공간에서 죽은 형을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서다.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드는 일이었지만 엄마는 그렇게 해서라도 형을 다시 만나고 싶어 했다. 마지막에 가서는 철회했지만. 그렇게 만나는 아들은 진짜 아들이 아니란 생각에서. 


아들의 흔적과 기록은 외장 하드에 담겼다. 소설은 열여덟에 죽은 형을 열여덟이 된 동생이 다시 마주하는 시점에서 출발한다. 형이 다녔던 고등학교에 입학한 동생. 형 선우진과 동생 선우혁은 깜짝 놀랄 정도로 체형과 외모가 흡사했다. 교복을 입은 혁을 보고 엄마는 진이 떠올라 눈물을 보인다. 열세 살 차이 나는 쌍둥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혁은 수업 시간에 가우디라는 집 짓기 게임에 대해 듣는다. 그 시절 형도 가우디 게임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 방에 들어가(그때까지 엄마는 형의 방을 남겨두었다.) 낡은 XR 헤드셋을 집어 든다. 헤드셋을 착용해 가상 공간으로 들어간다. 여러 번 시도 끝에 형의 아이디로 가우디에 입장한다. 무려 4,140일 만이다. 혁은 형 JIN이 만든 정원과 집을 둘러본다. 빠르게 유행하는 메타버스 안에서 JIN의 공간은 여전히 존재했다. 공유 친구인 누군가 캐시를 들여 가꾸었다는 뜻이다.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는 한 사람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소설이다. 후회와 자책이 남는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좀 더 다정하게 대할 순 없었을까.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런 식이다. 버스 정류장에 비슷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만 봐도 가슴이 내려앉는다. 왜 우리는 같이 늙어갈 수 없었을까. 가끔은 환하고 이내 어두워진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달래는 길은 없어서 그대로 내버려 둘 때가 많다. 


혁은 진이 남겨둔 흔적을 따라간다. 형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형의 이야기를 듣고 형이 남겨 두고 간 가우디에서 오랜 시간 떠나지 않고 공간을 가꾼 이를 찾아낸다. 후회의 마음 때문이다. 현실에서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나의 상황에 안심을 하는 일은 꼴불견이다. 그런 내색조차 쉽게 하면 안 된다. 다만 책이라는 공간에서는 어떨까. 너는 나보다 낫다는 생각을 마음껏 할 수 있지 않을까.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에서 진은 떠났지만 진의 음성과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에 부러움을 느꼈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네. 그 흔한 통화 녹음이나 메모지 한 장 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네. 언제고 너는 진의 목소리를 듣고 진을 기억하는 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잖아. 이런 속 좁은 생각을 책을 읽으면서는 나눌 수 있었다.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는다. 책의 세계에서의 규칙이다. 오직 등장인물들만이 나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 


누구에게도 나의 슬픔과 후회를 털어놓지 않는다. 각자의 슬픔과 후회만으로도 벅찰 테니.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작가가 만들어 놓은 가상 공간인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라는 세계에서 마음껏 죽음의 기억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 일이다. 너에게는 여름의 귤이, 나에게는 가을의 사과가. 명절이 되면 사과 한 박스를 산다. 가장 크고 비싼 사과를 고른다. 사과를 사 놓고 나를 기다리던 풍경의 기억 속으로 달려가기 위해. 


안녕. 


아주 오랜 시간 내내 안부를 물을게요. 


잘 지내요. 


떼쟁이 여름 때문에 가을이 문을 열고 들어오지 못하고 있지만 장난기 가득한 여름을 살살 달래는 중이라 곧 들어올 가을을 먼저 당신에게 보낼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금목서 향이 퍼지고 있지요. 


고마워요. 


내가 나일 수 있게 만들어주어서. 


우리는 언제든 함께임을 잊지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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