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건널목의 유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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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초자연적인 현상은 차에서 자다 깨 멀리서 본 하얀 형상이 전부이다. 가로등도 없는 산길을 가고 있었다. 분명 아무도 없어야 했는데 멀리 하얀 물체가 아른거렸다. 꽤 어린 시절의 기억인데 아직도 궁금하다. 뭐였을까.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의 혼령이었을까. 다시 생각해 보면 어렸고 자다 일어났고 그때까지 들었던 괴담의 영향이 정신에 미쳤을 거였다. 


그 후로는 없다. 가위눌림이 몇 번 있었지만 공부하면서 받은 스트레스가 뇌에 이상을 일으킨 거라 기이한 일에 해당하지 않는다. 요즘엔 일하는 가위를 눌린다. 몸은 이곳에 있는데 정신이 사무실에 가서 일을 하고 있다. 짜증 나서 빨리 깨고 싶은데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그러다 다시 잔다. 피곤이 가위를 이긴다. 바위가 아니고.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가 다가노 가즈아키의 『건널목의 유령』은 제목 그대로 유령을 다룬다. 전작과는 다른 결이라 제목만 이러겠지 했는데 본격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가답게 본격 유령 서스펜스 추리소설을 오랜만에 발표했다. 무려 11년 만이다.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추가되었다. 과작을 하는 작가의 신작을 기다리는 것. 아쉽게도 하라 료의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는 더 이상 못 읽는다. 다음 편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건널목의 유령』은 시모기타자와역에서 찍힌 사진과 동영상의 실체를 추적한다. 인명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역에서 기차가 몇 번이나 급정거를 했다. 기관사는 건널목에서 철로로 들어오는 형체를 보기도 한다. 프리랜서 잡지 기자 마쓰다는 독자 제보로 들어온 촬영된 사진과 동영상을 보고 의문과 호기심을 느낀다. 곧장 취재를 시작하고 자신도 이상한 체험을 하기에 이르는데. 


사건의 진실을 알아갈수록 놀라움과 안타까움의 연속이다. 단순히 잘못 본 것이라고 여기기에는 현상이 명확했다. 철로 주변을 확인하다가 한 여성의 형체와 마주하고 새벽 1시 3분에 여성의 신음 소리만이 들리는 전화를 받는다. 처음에는 자신이 과거의 기억을 안고 살고 있는 탓에 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건널목에 유령은 건널목의 사건이 된다.


추리소설과 유령이라니. 이 조합은 대체 무엇인가. 대체로 사회가 어둡고 망가져 가는 때에 기담과 괴담이 성행한다고 한다. 지금이, 그렇다. 90년대 중후반에도 그랬다. 방송사마다 귀신을 소재로 다큐와 드라마를 내보냈다. 어린 나는 그걸 보면서 무서워했고. 문을 열었는데 검은 한복을 입은 여자 귀신은 역대급으로 무서웠다. 한동안 방문을 열지 못할 정도. 


그러고 보니 괴담의 주인공은 여성이 많다. 약하고 차별받는 주체였지 않은가. 오래전부터. 『건널목의 유령』 역시 고전적인 서사를 따라간다. 기차를 급정거하게 만드는 유령의 실체는 여성이었다. 마쓰다는 끈질긴 취재를 통해 사건의 진실에 가닿는다. 죽어서까지 유령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서사는 서글펐다. 죽음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다른 세계로 무사히 가기 위해 살아 있는 자의 노력이 필요하다면 나타나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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