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의 공장 일지
김경민 지음 / 숨쉬는책공장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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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일을 구할 때의 국룰일까. 괜찮은 조건의 직장은 집에서 멀었다. 자차 운전 필수라는 조건에서 잘렸다. 버스가 다니는 곳이라 생각하고 갔지만 정류장에서 한참을 걸어야 하는 곳도 있었다. 야근만 없었어도 다닐 수 있었다. 야근이 있어서 심야에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야 했다. 최저시급에 맞춘 월급을 택시비로 태울 수는 없었다. 


통근 버스를 운행하는 곳도 있었지만 면접을 보러 가는 길도 험난한 곳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지만 하늘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를 돕기 위해서는 내가 움직여야 했다. 지역에 큰 제철소, 화학 단지 등 공장이 있었지만 운전이 안되니 그림의 공장이었다. 김경민의 책 『미르의 공장 일지』의 시작은 일식집에서 일을 하다 공장으로 버스를 타고 면접을 보러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작가 김경민은 필명 미르로 글을 쓴다. 엄마 태몽에 용이 나왔고 용의 순우리말 미르의 발음이 예뻐서 쓴단다. 일을 하면서 분노하는 일이 잦았고 그 일에 쓰다 보니 김경민이 아닌 다른 이름이 필요했다. 화가 났던 일상을 적기에 딱인 이름 아닌가. 불을 내뿜는 용, 미르. 그는 그렇게 미르라는 이름으로 공장에서 있었던 일을 썼다. 


여성으로 공장에 취업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워낙 사람이 자주 바뀌는 곳이라 그렇듯 어느새 기계 앞에 서 있게 되었다. 최근에 어떤 사람과 전에 일하던 곳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알바로 들어갔는데 너 계속 일해라 해서 정규직이 되었고 면접 때 들었던 일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더란다. 그렇게 6년을 일했다고. 차에 타라고 차를 탄 것뿐인데 여긴 어디 난 누구 하는 식으로. 


미르는 근로계약서와 퇴사서를 같이 쓴다. 갑자기 그만둘 경우를 대비해서 그런 것이라고 경리 담당자가 친절하게 알려준다. 한국 공장 현실과는 맞지 않는 외국 사례를 보여주는 안전 교육을 받고 라인을 탄다. 소음을 제거해 주는 스티커를 부착하는 일로 미르는 공장에서 본격적인 일을 한다. 『미르의 공장 일지』라는 제목처럼 공장에서 겪은 일을 일기와 일지의 중간 형식으로 기록한다. 


잔업, 사고, 불법파견, 원청, 도급, 법인 연수생, 재작업, 탄력근로제, 화재 경보음 같은 단어들이 쓰이지만 엄마, 통화, 한자, 힘내본다, 아이스크림이라는 말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연속 근무를 하고 잔업을 하는 중에도 미르 노동자는 자신이 겪어낸 하루를 글로 옮긴다. 함께 일을 하면서 나눈 노동자들과의 대화도 그들의 시간도 잊지 않기 위해 쓴다. 


공장일을 하면서 작가는 한자 공부를 한다. 주경야독.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공부를 한다. 미르는 이 말을 개똥 같은 소리라고 한다. 밭을 갈면 피곤해서 공부를 할 수가 없다고. 유튜브에 떠도는 직장인 공부 브이로그를 보고 있으면 나를 반성해야 하지만 저게 정말 가능한 건지 의문이 든다. 실제 일을 하고 공부를 하니 영상으로 남겼을 것이라 각성하고 이번 주 내내 일 끝나고 집에 와서 인강 하나를 듣는데 어깨가 아작이 날 것 같다. 


『미르의 공장 일지』는 그럼에도 해본다, 좋겠다, 실력을 키워야겠다는 그 시절 선생님에게 검사 맞기 위한 일기 속 마지막 문장, 다짐의 글이 있다. 의미를 생각하느라 결국엔 이해 못하는 나를 꾸짖게 되는 문장보다 단순하고 담백한 언어는 나를 건강하게 만든다. 드라마 《악귀》에서 경찰 홍새는 무심한 얼굴로 "일은 원래 다 힘들어. 그래서 돈 받고 하잖아"라는 2023년 올해 최고의 팩폭 명대사를 날린다. 귀신이 나온다기에 귀신이 나오면 놀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 대사에 심장이 섬뜩하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모두 아프지 않고 죽으면 더더욱 안 되고. 내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하루여도 어제도 내일도 나는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는 걸 잊지 말고. 그냥 그런 사람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하고. 다 울었으면 책을 펴자. 한자, 영어, 한국사, 회계, 세무 등등 직무와 관련 있는 일이든 아니든 골라보자. 책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오늘 있었던 더럽고 치사한 일이 잊힌다. 왜냐. 책이 너무 많고 가격도 좀 있어서. (그래서 나는 영어 학습지를 할 거냐 말거냐. 하는 사이에 가격이 올랐네. 이런.)


일을 하고 돌아와 한자 공부를 하는 미르의 뒷모습이 『미르의 공장 일지』에 있다. 모두 함께 살기 위해 어제 익힌 걸 오늘 까먹는 앞모습도. 나를 위한 공부는 너와 우리를 위한 공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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