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좋은 이름 (리커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평점 :
품절


실업급여, 권고사직이란 단어를 넣고 검색하다가 기사에 김애란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의 어느 한 문장을 읽고 멍해졌다. 실업급여를 타러 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한 결과 어떤 계층은 웃으면서 오고 어떤 계층은 침울한 얼굴로 온다는 담당자의 말이 공식적으로 발화된 말인지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그들이 낸 고용보험료는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일을 그만두어야 했을 때 실업 급여라는 제도로 돌아온다. 정당한 권리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실업 급여 받아서 해외여행 가고 샤넬 선글라스를 산다니 실업급여 대상자의 계좌 추적이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기사에 인용된 문장은 이렇다. '나는 우리 삶에 생존만 있는 게 아니라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게 좋았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저한도의 임금 그러니까 2024년에는 지금보다 240원이 오른다. (장난쳐?) 하루 8시간 근무 기준으로 2,060,740원을 받는다. 내년에는. 이걸 다 받는 건 아니고 여기서 4대보험료와 소득세 및 지방세를 공제한다. 각자의 생활과 소비 패턴이 다르기에 세전 금액으로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생활을 꾸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지금의 상황으로는 사치도 허영도 아름다움이라는 세 단어는 저 금액에 끼어들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절약하는 아름다움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잊기 좋은 이름』의 작가 김애란을 키운 팔 할에 대한 이야기는 첫 부분에 등장한다. 어머니가 20년 넘게 손칼국수를 팔았던 '맛나당'에서 작가의 유년은 시작한다. 공기처럼 스며든 맛나당의 정서를 풀어 놓으며 스스로 돈을 벌어 생활을 꾸려간 어머니의 모습에는 사치와 허영, 아름다움이 있었다. 번 돈을 모두 생활에 쏟아부은 건 아니라는 거. 자신이 번 돈으로 방문판매원이 권하는 화장품을 사고 비전 냄비, 코끼리 보온 도시락을 사던 작가 어머니의 옆모습은 그 글을 읽는 독자인 나의 어머니의 옆모습과도 겹쳐진다. 


우리 앞에 생존만 있다면 얼마나 지치고 가엽고 숨이 찰 것인가. 권리로 받은 국가의 혜택 앞에서 표정을 관리해야 하고 먹을 게 아닌 다른 걸 샀다는 이유로 공개적인 비난을 받는 현실은 참으로 가혹하다. 『잊기 좋은 이름』은 작가의 유년과 작가가 되고 난 후의 단상이 읽기 좋은 쉬운 언어로 쓰여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연애시절 이야기부터 지금은 사라진 출판사의 풍경, 상을 탄 동료 작가에게 바치는 축하의 글, 감명 깊게 읽은 책의 독후감, 연필을 주고받은 어느 봄의 기억들이 뜨거운 여름 한낮에 불어오는 바람 같은 모습으로 실려있다. 


듀스의 여름 안에서를 듣는 열다섯 아이는 선생님이 되라던 엄마의 말을 거스르고 예술 학교에 진학을 했다. 방을 얻기 위해 8월의 서울을 어머니와 돌아다녔고 지친 나머지 누구나 그렇듯 아무 집이나 계약을 하고 팥빙수를 먹었다. 어둡고 선득한 방에서 전 세입자들이 붙여 놓은 천장의 야광 별을 응시하고 책을 읽고 아무 때나 놀러 다녔다. 설거지를 하다 자신의 소설을 읽어주는 팟캐스트를 들으며 기억을 품은 우리 모두의 계절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책에서 책으로. 『잊기 좋은 이름』을 읽고 박완서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를 읽는다. 다시 한번 놀란다. 몇 십 년 전에도 쓰였을 박완서의 소설은 2023년의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을 그리고 있으며 엄청난 속도감의 문장들이어서. 나는 『잊기 좋은 이름』을 한동안 『잊기 좋은 여름』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잊기 좋은 이름』이든 『잊기 좋은 여름』이든 잊기 좋은 건 없었다. 잊고 있었다는 착각을 할 뿐이다. 이름을 떠올리다 보면 그 여름 어느 풍경을 떠올리고야 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