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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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황정은이 떠올랐다. 이른 아침 알람을 꺼야 하는데 손은 움직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다시 눕고 싶을 때 말이다. 그해 겨울은 추웠고 신문을 사러 가는 길은 멀었다. 신춘문예 당선작이 실린 신문을 옆에 두고 떡국을 끓여 먹었다. 솜씨가 없는 요리였는데 옆 사람은 맛있게 먹어 주었다. 무얼 해준다고 하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리는 사람. 


황정은의 「마더」를 읽고 공책에 감상을 적었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고 『연년세세』를 꺼내들었다. 책이 막 나왔을 때 사 놓고 읽어야지 했다가 잊어버렸다. 왜 잊었을까. 그런 건 기억에 남지 않고 책이 있다는 사실만을 기억해 냈다. 어제는 사무실로 가다가 멈춰 섰다. 비가 오고 다음날이라 하늘은 미세먼지 없이 맑았다. 벚꽃나무를 찍었다. 비가 오기 전에 모두 떨어질 꽃잎이 남아 있는 벚꽃나무를 향해 찰칵. 우리는 자정이 되기 전까지 업무 통화를 했다. 말 끝에 꽃도 못 보고 시간을 다 보내겠다는 상대의 한탄이 떠올라서. 


그곳에도 꽃은 피겠지만 이곳의 지금의 봄을 담아 보내도 될까요? 


『연년세세』에 실린 네 편의 단편은 겨울의 입김을 닮았다. 봄의 온기는 쉬이 느껴지지 않고 겨울의 한기가 소설 곳곳에 실려있다. 황정은은 작가의 말에서 '사는 동안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자주 만났'다고 밝힌다. 그가 자주 만난 여성 순자는 쉽게 단념하고 포기를 한다는 자각도 없이 생의 모든 면에서 포기를 단행한다.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고 지금은 큰 딸의 살림을 봐주면서 살아간다. 작은 딸과 외조부의 이장을 하러 가는 여정을 그린 「파묘」. 


순일의 큰 딸 한영진의 일상 풍경을 담은 「하고 싶은 말」은 입 밖으로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을 내내 참고 있는 한 여성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기 위해 단어와 문장을 고르느라 자신을 아프게 해버리는 사람. 영진은 당신과 나이기도 하다. 「무명無名」에서 순일은 어린 시절 자신의 이름 순자를 기억해 낸다. 그리고 함께 한 시절을 보냈던 순자까지도. 나를 지키기 위해 잘못을 저질렀던 후회의 시간이 순자들에게 있었다. 


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이미 떨어져 더러워진 것들 중에 그래도 먹을 만한 걸 골라 오물을 털어내고 입에 넣는 일, 어쨌든 그것 가운데 그래도 각자가 보기에 좀 나아 보이는 것을 먹는 일, 그게 어른의 일인지도 모르겠어.

(황정은, 『연년세세』, 「다가오는 것들」 中에서)


순일의 둘째 딸 한세진의 순간순간은 「다가오는 것들」에 있다. 북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뉴욕으로 향한 세진. 그곳에서 세진은 자신이 일부러 두고 왔을지도 모를 과거를 만난다. 시간은 흐른다고 생각했다. 흐르고 흘러서 오늘로 도착한다고. 어른인 척 살아가는 오늘은 오늘이 아니라는 걸 『연년세세』의 순간이 말해준다. 어른의 얼굴로 지내는 오늘은 실수로 가득한 어제 얼굴의 반복. 어제와 오늘은 뒤섞이며 내일로 나아간다. 


잘못했고 틀렸다. 이런 말들을 듣는 오후는 병으로 죽어간 이의 얼굴이 스쳐간다. 진통제를 맞고 잠이 든 이는 한 번 정신을 차려 큰 소리를 내고 내내 눈을 감았다. 잘못했고 틀렸지만 살 수 있다, 살아간다. 잘못했고 틀렸지만 안심할 수 있는 건 그이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나의 잘못과 실수를 덮는 용도로 사용한다는 건 기만일 테지만 산 자는 이렇듯 뻔뻔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그러니 모두 죽지 마.


연년세세의 뜻은 '해마다, 매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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