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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마치 비트코인
염기원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1월
평점 :
이사 온 지 5년째가 다 되어가지만 나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잘 모른다. 엘리베이터 안에 아무도 없으면 안도한다. 가끔 앞 집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겨우 -세요 라고 작은 목소리로 인사한다. 안녕하는 묵음 처리된다. 눈이 많이 오던 날 앞 집 아저씨를 문 앞에서 딱 마주치고 말았는데 스몰토크를 시도하셔서 횡설수설 하고는 후회했다.
그래도 엘리베이터 안에 소식지들은 열심히 읽는다. 회의가 있었고 회의 결과는 어떠했고 하는 내용들. 자발적 아싸라고 하지만 가끔 무리 안이 어떤지 궁금해하는 소심한 관종이다. 어떤 배우의 말처럼 아무도 나를 모르고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은둔하면서 살고 싶은 소망이 간절하다. 와이파이는 잘 터져야 하고 너무 놀면 어두워지니까 하루에 세 시간에서 네 시간 일주일에 이틀 정도 노동하는 걸로 사회성을 유지하면서.
염기원의 장편소설 『인생 마치 비트코인』은 쓸쓸하고 삭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설은 단 한 명의 인물에게도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 대표, 사장, 여자, 남자, 어머니, 나 이런 식이다. 주인공인 '나'는 오피스텔 건물을 관리한다. 입주자들의 불편 사항을 접수해서 해결하고 월세와 관리비 납부 내역을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마흔이 곧 되어가고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친구는 없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아! '나'의 친구는 이름이 있다) 성진과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염기원은 서울과 지방의 경계를 인물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식으로 나눈다. 서울에서의 삶은 누구의 이름도 알고 싶지도 중요하지도 않다는 '나'의 내면을 반영한다. 성진과 용산 전자 상가에서 일을 한다. 박봉에 업무 강도도 높았다. 성진은 더 버티지 못했고 '나'는 일을 바꿔가면서 서울에서 겨우 살아간다.
잘못된 정보로 주식 투자에서 돈을 잃고 '나'는 경마장에서 만난 사장에게 전화를 건다. 사장은 오피스텔 관리를 맡아달라고 했다. 관리인으로 주거 문제를 해결하고 부수입을 챙겨가면서 돈을 모으고 있다. 403호에서 일어난 일만 없었다면 오늘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모르는 채로 각성 없이 시간을 흘려보냈을 것이다. 관리비 미납으로 403호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받지 않았다.
문 앞에 다가가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 걸 알아챘다. 현관 아래에서 파리 유충이 보였다. 사장의 동의를 얻어 문을 따고 들어갔다. 여자는 죽어 있었다. 특수청소 업체에게 전화를 거는 대신 스스로 청소를 하기로 한다. 그렇게 하면 돈을 중간에서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403호 여자는 죽기 전 집 안을 정리했고 일기장과 물건 하나만 남겼다.
'나'는 여자의 일기장을 읽으며 여자의 고단한 삶을 알게 된다. 『인생 마치 비트코인』은 보통의 평범한 삶을 꿈꾸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은 현실을 꼬집는다. 대학을 가고 학자금 대출 없이 학교생활을 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는 기성세대의 삶의 방식은 이제는 전설이 되어 버렸다. 향수와 동경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 건 선택 사항이 되어 버렸다. 무엇이 되고 싶다, 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는 청춘들의 오늘이 『인생 마치 비트코인』에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