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러키 스타트업
정지음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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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업계에서 쓰는 단어인 벤더라는 걸 이해하고 싶어 한참 상대의 말을 들었다. 대형마트에 행사팀으로 들어갈 수 있게 중간에 다리를 놔주는 거군요. 중언부언의 말 끝에 내가 이해한 내용이었다. 그럼 사업자등록증과 통장 사본 보내주세요 했더니 자기가 지금 짐 정리가 끝나서 통장이 없단다. 두 개 보내주셔야 입금이 됩니다. 왜 이렇게 빡빡하게 구냐고 융통성이 없다고 전라도 사람이라서 그러냐고.


음. 여기서 나의 문제점은 모욕의 말을 들어도 그게 모욕인지 농담인지 생각하는 순간이 길다는 거. 판단 능력이 재빠르지 않다는 거. 나이와 결혼 유무를 묻길래 나는 또 왜 등신처럼 고분고분 말하고 있는지. 갑갑하게 구니 그 나이 먹도록 결혼을 못 한 거냐고. 웃다가 농담이라고. 그래도 안 된다고 서류 보내주시라고 했더니 나에게 깝깝하게 군다고 서너 번은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 작게 한숨을 쉬었지만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의 화는 나지 않았다. 상대의 말투가 웃겼고 벤더라는 걸 길게도 설명해 줘서. 그냥 하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서 정지음의 『언러키 스타트업』을 읽으며 낄낄거려서 낮의 일은 에피소드 정도로 지나갔다. 책의 시작은 SGC TEST라는 이른바 시궁창 테스트로 포문을 연다. 수능 볼 때보다도 더 진지하게 문제를 읽고 점수를 더했다. 나중에 @@ 님에게 해보라고 했더니 전투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점수를 합산하더라. 근래 본 모습 중에 제일 진지해서 빵 터졌다. 


같은 곳에서 일해 그럴까. @@ 님과 나는 약한 파동형으로 결괏값이 나왔다. 서로 조심하자. 불행의 초입이라니까. 『언러키 스타트업』은 '국제마인드뷰티콘텐츠그룹'이라는 이름만 들었을 땐 뭐 하는 회사인지 잠시 고민하게 만드는 곳에서 벌어지는 웃음과 슬픔의 난장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대표 박국제를 중심으로 그의 온갖 변덕과 광기를 등에 짊어진 채 일하는 다정, 수진, 지구, 혜은, 보정의 이야기는 웃으면 안 되는데 가차 없이 웃긴다.


특히 주인공인 김다정 DJ 주임은 소설 속 인물인데 나 같아서(문예창작학과 나왔다고 사훈을 캘리그래피로 쓰라는 에피소드에서는 눈물이 났다) 과몰입해서 읽느라 내가 박국제 밑에서 일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지기도 했다. 박국제. 아, 박국제. 대표 박국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할 수만 있다면 드라마 《 W 》에서 보여준 기법처럼 소설 속으로 들어가…. 들어간다고 해도 현실의 이 성격으로는 다정 주임님처럼은 못 하겠지. 박국제의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온몸으로 흡수해 병이 들고 그러다 죽겠지. 


-맞다. 니들 블라인드 해 달랬지? 내가 그거 당장 해 줄게.

-… ….

-이야, 여수 다녀오면 사무실이 더 아늑해지겠어. 김다정이 오늘 소원 풀었네, 안 그래?

나는 마지못해 감사하단 대답을 웅얼거렸다.

직장인의 '감사합니다'는 때로 경멸의 뜻이기도 했지만, 대표들은 늘 그것을 몰랐다. 몰라도 돼서 몰랐고, 모르는 게 나으니까 몰랐고, 실제로도 그냥 몰랐다.

(정지음, 『언러키 스타트업』中에서)


맥락 없이 '감사합니다'를 연발하고 있는 요즘이다. 다정 주임님이 주말과 맞바꾸며 블라인드를 획득하는 장면에서 박국제한테 감사합니다를 말하는데 감사할 상황도 아닌데 감사합니다를 추임새처럼 말하는 내가 왜 그러고 있지 했는데 그 장면을 보고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감사합니다는 상대를 어쩌지는 못하겠고 그저 밉고 싫은 경멸의 감정을 숨기는 방어기제라는 것을. 


책을 읽다가 배를 그러안고 넘어질 정도로 몹시 웃는 포복절도의 순간을 근래 들어 맞이한 적이 있던가. 자야 되는데 하면서도 『언러키 스타트업』을 놓지 못했다. 뒤로 갈수록 환장과 난장과 막장이 이어지며 배가 끊어질 정도로 웃겼기 때문이다. 대표 악당 진짜 대표인 박국제가 벌이는 악당 같은 짓을 보고 있으니 그간 내가 당했던 설움과 모욕과 슬픔이 쓰나미 같은 기세로 밀려들다가도 웃기니까 웃었다. 나만 이러고 사는 게 아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구나 위로받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언러키 스타트업』은 강제로 위로를 주입해 주고 장렬히 끝났다. 


어째 드라마나 영화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 완벽하다. 어떤 개소리를 들어도 타격감 없이 웃게 된 건 다행한 일인지. 그날 내가 전화 통화에서 들은 이야기를 깔깔거리며 @@ 님에게 해줬더니 그거 전라도 비하 아니냐고 화를 내주었다. 그래 약한 파동형끼리 이렇게라도 하루하루 버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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