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감지 마라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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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무실에서 근무하다 물을 마시러 갔다. 일을 시작하기 전 정수기 앞에서 창문 밖을 본다. 물을 받으면서 잠깐의 멍을 때린다. 어떤 날은 생각 없이 연속을 눌러 놓고 멈추지를 못해 다시 바닥을 닫는다. 사무실에서 내 유일한 휴식처는 정수기 앞이다. 정수기는 말이 없다. 메모! 이러면서 급하게 해야 할 일과 숫자를 부르지도 않고 영악함을 드러내며 성실한 척을 하지도 않는다. 터치만 하면 조건 없이 냉수와 온수와 얼음을 내 컵에 부어준다. 


정수기가 갖고 싶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의 생각이었다. 집에도 이런 얼음 나오는 정수기가 있으면 좋겠다. 운명의 장난일까. 비데 필터를 교체 하러 온 매니저님이 내게 렌털 제품 소개가 담긴 팸플릿을 내밀었다. 호갱님의 전형인 나는 한 달 사용료와 설치비를 물었다. 영업에 능숙하신 매니저님은 내 이름과 직장명, 전화번호를 가져가셨다. 조만간 연락이 오려나. 한 달에 40,900원. 


이기호의 소설집 『눈감지마라』의 주인공 진만의 재산목록 1호는 오쿠 중탕기이다. 중고 마켓에서 10만 원 주고 산 그걸 진만은 애지중지한다. 그의 친구 정용은 진만 몰래 오쿠 중탕기에서 맥반석 달걀을 꺼내 먹기도 한다. 다른 애들은 돈이 있으면 컴퓨터나 핸드폰을 바꾸는데 얘는 오쿠 중탕기를 사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방 대학을 졸업하고 광역시로 보증금 없는 월세 30만 원짜리 집을 구해 이사를 가면서도 진만은 오쿠 중탕기를 챙겼다.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 달걀을 꺼내 먹는데 할머니가 다가와 집에 들어가라며 오천 원을 주기도 했다. 


소설은 지방러 청춘 정용과 진만의 어느 한때를 그러니까 다시 돌아갈 수도 없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은 청춘의 어느 한 시절을 그린다. 전라도 말로 짠하고 짠해서 소설을 읽다가 눈물이 나서 눈감지말라고 했는데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은 졸업했지만 스펙 이런 게 없어 등록금 내느라 그들 표현대로 학교만 다녔을 뿐인데 빚쟁이가 되어 아르바이트 생활에 뛰어든다. 죽도록 무거워서 죽통인가 싶을 정도로 무거운 죽통을 나르고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삼계탕 집에서 설거지를 한다. 


정용과 진만이 쉬는 날 그들은 월동 준비를 하러 마트에 간다. 팬티스타킹과 라면을 사러 갔는데 진만의 눈에 롱패딩이 눈에 띈다. 35만 원. 진만은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좀 더 저렴한 패딩을 사 온다. 『눈감지마라』에 실린 각각의 이야기들은 어느 시절의 나를 너를 엿보고 있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돈이 없어서 치사해지고 만 어떤 날들의 기억. 그깟 돈이 뭐라고 그랬을까 하기엔 그깟 돈은 중요했다. 월세와 공과금 내는 날은 월급날보다 빠르게 찾아오고 이 정도 모았으니 전셋집을 구할 수 있겠지 했는데 그 사이에 집값이 뛰어 보증금도 되지 않았다. 


『눈감지마라』의 후반부는 서글펐다. 지방 대학에 나와서 그러고도 서울로 가지 못하고 지방에 살아서 겪었던 그들의 일이 그들의 일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이 많고 복잡하고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 숨이 가빠 오면 정수기 앞으로 간다. 쪼르르 물이 텀블러에 담기는 시간 동안 호흡의 리듬을 다시 찾는다. 들이 마시고 내쉬고. 들이 마시고 내쉬고. 정수기야 오늘 나 정시 퇴근했으면 좋겠다. 너랑 밤늦게까지 있고 싶지 않은데. 네가 얼음 만드느라 소리 낼 때 놀라고 싶지 않거든. 그래도 늘 고맙다. 우리 집에도 네가 있으면 좋겠다. 어쩌면 나는 너랑 오래도록 있고 싶어서 야근을 하는지 모르겠다. 


만 명에게만 평등한 법. 『눈감지마라』의 존재가 소중한 이유는 지방에 사는 청춘의 이야기를 관심 가지고 있는 그대로 전해주는 이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 여기 있다. 잊지 마라. 눈 감지 말고 똑똑히 봐라. 선거철에만 찾아오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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