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은 장미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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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소설집 『장미의 이름은 장미』에 실린 네 번째 단편 「아가씨 유정도 하지」의 주인공 유정은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은 자기의 현재에 살아야지'라고. 이 말은 유정의 입버릇이기도 하다. 그녀는 팔십이 넘었지만 활동적이다. 환갑이 넘어서 운전면허를 땄고 불교대학에서 컴퓨터를 익혔다. 시니어 요가 대회에 나가 본선까지 올라갔다. 혼자 있는 것보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소설집에 실린 네 편의 이야기 속 배경은 뉴욕이다.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는 팀원들의 커피를 사러 나왔다가 친구 민영이 올린 언제든 환영이라는 글에 응답한 승아의 뉴욕 이야기가 펼쳐진다. 정규직 채용이 불분명한 상태인지라 승아는 열흘의 휴가를 연차까지 붙여 충동적으로 뉴욕으로 날아간다. 승아는 민영이 올린 게시글과는 상황이 다른 현실에 당황한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에서는 마흔여섯이 된 '나'가 잠시 세계에서 이탈하는 기분으로 어학연수를 온다. 그곳에서 마마두를 만나 우정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히지만 한시적인 상황에서 느끼는 기분이라는 걸 깨닫는다. 누군갈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은 여행자들이 느끼는 고유의 권한이라는 것도. 변화와 변화하지 않음에 지친 '나'는 연수에서 돌아와 새로운 시작을 시도한다.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곳에서라면 새로운 기분을 느끼고 뭐라도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양과 시계가 없는 궁전」에서 현주는 희곡을 쓰기 위해 사촌 언니의 소개로 만난 로언이 있는 곳에서 머물지만 귀의 염증만 심해질 뿐이다. 미묘하게 느끼는 문화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로 로언과의 만남은 이후로 예정되지 못한다. 「아가씨 유정도 하지」의 유정이 말한 대로 사람은 현재에 살아야 하지만 『장미의 이름은 장미』속 인물들은 과거에 매몰되어 있는 상태로 지낸다. 


여기가 아닌 거기, 그곳에서라면 이곳의 구질구질함과 실패를 벗어던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모호한 기대는 무참히 깨진다. 소설은 실패를 극복하기가 아닌 들여다보기를 통해서 아픔을 방치한 채 내일로 나아가는 이상한 씩씩함을 보여준다.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불안감인지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도약 내지 멈춤의 행위를 하도록 유도한다. 


인물들은 은근한 차별과 멸시가 존재하는 뉴욕에서의 경험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오거나 돌아올 준비를 한다. 무얼 시작하기도 포기하기도 애매한 자신의 현재를 안고서 말이다. 포기가 답이라면 포기를 하고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시작하는 것.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게 삶의 비극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오랜만에 읽은 은희경의 문장은 술술 잘도 읽히고 여전히 은희경은 그때의 은희경이라서 안심이 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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