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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여름 2022 ㅣ 소설 보다
김지연.이미상.함윤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6월
평점 :
서툰 여름의 시간을 지나왔다. 호의가 아닌 줄도 알면서도 호의라고 믿으며 누군가의 호의를 간절하게 기대했던 시간이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의 제목을 무한정 읊조리는 나날이었다. 내가 누군가가 된다면 기꺼이 언제든 전화하라고 언제든 전화해도 응답해 줄 수 있는 상태가 돼 있어야지 했다.
'여름, 이 계절의 소설'의 부제로 『소설 보다 : 여름 2022』 속 첫 번째 소설에는 한없이 전화를 거는 사람들이 나온다. 김지연의 「포기」는 오직 신의로만 돈을 빌려준 호두와 빚쟁이들을 피해 이곳저곳을 떠도는 민재,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나'의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이다. 민재에게 빌려준 돈만 받으면 호두는 언제든지 친척 집에서 나와 방을 마련할 예정이다. 예정은 늦어지고 민재는 자신이 고동에 있다고만 말하지 정확히 어디에 있다고 알려오지 않는다. 제목처럼 포기를 해야 예정은 이뤄질까.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이라는 네모네모 한 소설에서 이미상은 '할 수 있지만 하기 싫은 일'의 서사를 들려준다. 집 안에 한두 명쯤 존재하는 잉여 인력인 고모와 자매는 사냥을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불쾌한 남성들과의 시간을 통해 왜 우리는 하기 싫은 일을 할 수밖에 없는지 슬프고도 암담한 어조로 이유를 말해준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이 일은 할 수 있다. 하지만 하기는 싫다. 그래도 해야 한다. 뫼비우스의 띠에 갇혀 고통받고 있다. 할 수 있어서 하지만 하기 싫다.
「강가/Ganga」에는 자신의 이름을 '강가'라고 부르는 여성이 나온다. 공장에서 일해 모은 돈으로 여행을 온 나는 도시에 내리자마자 자신을 '강가'라고 지칭한다. 남자를 사기 위해 이곳에 왔노라고. 공장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일을 했고 그들 일에 도움을 주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지만 자세한 서사는 나오지 않는다. 타인의 어려움에 도움을 줄 수 없었고 도망치듯 여행을 왔을 뿐이다. '유 쎄이브 마이 라이프. 당신이 내 목숨을 구했어요'라는 말을 듣기 위해 온 것일까. 소설은 살면서 겪는 알 수 없는 근원의 죄책감을 이야기한다.
내일, 미래, 예정, 추후의 일, 약속, 선언. 이 같은 단어들이 실재하고 지켜지리라 믿었다. 말은 공허하고 문장이 되어도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2022년 여름의 약속은 휘발되고 그것은 잘못이라는 말만 남았다. 어린 내게 어른들의 말은 이를테면 먹고사는 건 힘든 일, 기술을 배워야 살 수 있다, 살만하면 죽는다 같은 소리는 그저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해 하는 한심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 오래 버티고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야 하는 시간이다.
중심부로 가지 못하고 주변부에만 머물다가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을 버리고 새로 지은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 비범함이 아닌 평범함을 꿈꾸는 삶. 누군가의 하기 싫은 일을 선뜻해버리는 삶. 『소설 보다 : 여름 2022』의 세계 속 삶의 모습은 그러했다. 내게 도착할 이야기였을까 의심하며 문장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미움이 산처럼 쌓였다. 흘러넘친 미움을 보고만 있었다. 미리 대비하지 못한 탓이었다. 전부 쓸려 가고 정말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 게 맞겠다는 결론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