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봄 2022 소설 보다
김병운.위수정.이주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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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아내야 하는 일이 있을까. 참지 않을 순 없을까. 『소설 보다 : 봄 2022』에 실린 세 편의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는 '참아냄'이다. 자신이 성적 소수자임을 밝힐 수 없는 일상을 남편이 아닌 누군가를 좋아하는 자신을 사실이 아닌 추문을 들으며 다니는 회사 생활을 모두 견디고 참아내는 인물이 『소설 보다 : 봄 2022』에 등장한다. 


봄에는 추운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이한 사람들이 간혹 쓰러지고 쉽게 일어서지 못하던데. 세 이야기 속 인물들의 끝은 어떻게 될까. 소설이 아닌 다른 세계에 발을 담그려 해도 책장에 무심히 꽂혀 있는 책들 때문에 나는 다시 소설의 세계로 끌려온다. 그렇게 마주한 지나간 계절의 이야기. 가을이 성큼 왔다가 미련 많은 여름에게 은근슬쩍 자리를 내주는 9월에 도착한 늦은 봄의 이야기. 


김병운의 「윤광호」를 읽다가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이광수의 『무정』을 읽던 시절로. 영채라는 신식 이름을 가진 인물에게 매료되었으나 나중에 작가가 친일을 했다는 이유로 실망하고만 그때로. 소설은 게이 인권 단체 M에서 만난 윤광호라는 인물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쓰인다. 후에 그의 진짜 이름이 윤광호가 아니었음을 알고 그가 이야기해 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회는 변화할 것이라는 정언 명령이 실천되는 걸 확인한다. 


어떤 시간에는 핸드폰 메모장을 열어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감정이 없는 것처럼 굴자'라고 반복해서 적었다. 마음과 감정이 있어 내가 나를 다치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결코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위수정의 「아무도」에서 '나'는 남편과 별거를 한 채 혼자 나와 지낸다. 부모는 '나'에게 아무런 조언도 충고도 하지 않는다. 마음이라는 게 있어 남편이 아닌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자신을 이해해 보려다가 실패한다. 


P. D. 제임스를 읽다가 알았다. 번역가 이주혜가 소설가 이주혜라는 것을. 『소설 보다 : 봄 2022』에 실린 마지막 소설은 이주혜의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였다. 마침 병렬 독서 중이라 P. D. 제임스의 「겨우살이 살인사건」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번역가의 약력을 읽었다. 옆에 놓인 『소설 보다 : 봄 2022』에도 같은 이름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이주혜는 이 이주혜였다. 어쩐지 외국 소설인데도 잘 읽히더라. 어린 나이에 집안을 책임지며 살아온 여성이 수술 후에 영혼이 분리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좀 살만하니까 아프거나 사고로 죽는다.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에는 두 명의 여성이 나온다. 은정과 소희. 둘은 가구 회사의 사수와 부사수로 만나지만 언니, 동생으로 지낸다. 사장의 총아가 소희가 아닌 은정으로 드러나면서 사이는 소원해진다. 자궁을 드러내는 수술을 하던 은정은 영혼이 되어 30년 넘게 근무한 회사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지나간 시절을 회상한다. 비밀스러운 일본 출장길과 끝내 오해를 풀지 못한 이후의 시간을.


견디지 않았으면 한다. 미래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참고 견디면서 혹독한 시간을 살아내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맞지 않으면 마음을 던지는 식으로. 가시 돋친 말은 다시 돌려주는 식으로. 소설 속 인물의 삶을 참고삼아 현실의 나는 단단해지기를 바란다. 나중을 걱정하느라 현재를 소진하는 방식으로 살아낸 사람의 최후를 알고 있으므로. 언젠가 네가 쓰는 소설 속 인물들은 왜 다들 병들고 불행하기만 하냐는 질문을 받은 적 있다. 병들지 않고 불행하지 않은 사람이 있긴 하나요. 그간의 삶은 그랬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말이어서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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