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시시한 기분은 없다
허연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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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내가 뭐하고 지냈냐면.


대니 샤피로의 『계속 쓰기』를 읽다가 말다가. 한 시간 쓰기를 하다가 말다가. 무계획형인 P답게 지냈다.


8월부터는 업무가 바뀌는데 어떤 날에는 두려워하다가 다른 어떤 날에는 그까짓 거 뭐 하면서 요란한 마음을 달래면서. 감정형인 F답게.


허연의 산문집 『너에게 시시한 기분은 없다』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통, 슬픔, 허무를 시의 언어로 말한다. 시가 되지 못한 글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는 글이다. 어두운 방에서 하루치의 이상함을 녹여 내기에 충분한 글이었다. 나만 그런 걸까. 하루는 이상하고 알 수 없고 설명하기 힘들다. 안 좋은 머리로 이해해 보려고 해도 인과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인간들이 자신들의 소멸을 그토록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어쩌면 그들이 안도감을 느끼며 자기들의 소멸에 동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허연, 『너에게 시시한 기분은 없다』中에서)


책에서는 죽음의 기억이 난무한다. 이미 사라져 버린 사람들을 소환한다. 젊은 시절 내내 아팠던 어머니, 화가, 시인 그리고 어쩌면 나. 시인으로서의 자아와 일상인으로서의 자아는 서로 부딪치지 않고 잘 지내왔던 것일까. 사는 일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줄도 모르고 우주의 한 점도 못 되는 지구에서 우리는 다투고 슬퍼하고 헤어진다. 시인은 그걸 안타까워한다.


빨리 읽을 수가 없는 책이다. 『너에게 시시한 기분은 없다』는. 한 페이지를 읽고 다음 장을 넘길 수가 없어서 그대로 다시 잠든 하루가 여러 날이었다. 그래도 사랑이 있었다. 허무해서 슬퍼서 일어나기 힘들어도 사랑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괜찮아졌다. 온갖 사랑을 경험해 놓고 마치 사랑이 생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굴지 않았던가. 살아있는 자로서의 슬픔을 말하다가도 사랑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글에서는 용기가 솟아오른다.


사랑하는 이가 괴물이 되어도 사랑할 수 있을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 준 Eldon의 Monster를 반복 재생해서 듣고 있다. 가사의 시작은 "왜 나를 사랑해? 난 괴물인데"이다. 영화 《살아있다》에서는 좀비가 되어 버린 아내를 밖으로 보내지 못하고 집에 놓아둔 채 산 사람을 기다리는 남자가 나온다. 사람을 물어뜯는 괴물이 되었다고 해도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허연은 놓쳐버린 두 개의 사랑을 들려준다.


어쩌면 우리는 상대가 괴물인 줄 알면서도 사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괴물의 어떤 면을 인식하면서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시가 있다. 사랑 뒤에는 시의 자리가 마련된다. 허연의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읽으며 나는 연필로 기분을 적었다. 폭우가 예상되는 날씨 속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는 기억만으로 힘이 되는 날이 있다. 그런 힘으로라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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