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하는 자세 - ‘첫 책 지원 공모’ 선정작
이태승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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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강도는 낮아졌는데 집에 돌아오면 눕기 바빴다. 바깥의 먼지는 털어내야 하니까 씻고 누웠다. 한 손에는 리모컨을 손에 든 채. 넷플릭스와 웨이브, 티빙, 유튜브를 왔다 갔다 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왜 이리 재밌는 게 많은지. 영상 하나만 보고 책 읽어야지. 리뷰 써야지. 일기 써야지. 마음속에 생각만 할 뿐 현실은 계속 드러누워 있었다. 나도 내가 곧 정신을 차릴 줄 알았다. 며칠만 그러다 말겠지. 이후 몇 달 동안 나는 그동안 보지 못한 드라마를 쉼 없이 봤다.


한 달에 많이 읽어야 다섯 권이 최대 독서량이 되어 버렸다. 예전의 나는. 근심 걱정을 모르던 시절에는 읽고 또 읽었는데. 열 권도 넘게 읽었는데. 한 번 세상의 쓴맛을 보고 나서는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생각하기가 싫었던 것 같다. 문장을 읽으면 상상을 하고 이해를 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버거웠다. 뭐 어떡하든 되겠지. 차츰 좋아지겠지. 무너진 정신의 복구는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산 사람은 살아가니까. 그러다.


불현듯 정신을 차린 건 아니고. 1%씩 현실 감각이 돌아오는 중이다. 돈을 써야 한다. 책을 사고 키보드를 사고. 자본주의는 돈은 우울과 불안을 치유하는데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도움이 되었다. 책을 샀으니 읽어야지. 키보드를 샀으니 뭐라도 써야지. 책상에 앉았다. 이태승의 소설집 『근로하는 자세』를 주중에 꾸준히 읽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내내 누워서 리모컨만 누르고 있었는데 이제는 전자책의 리모컨을 누르고 있다. 책 샀으니까. 단순한 이유에서.


첫 소설은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로 공무원의 세계를 밀도 있게 그린다. 선출직 시장의 패기로 제안된 사업에 실무를 담당한 '나'는 골치 아픈 일을 처리해야 한다. 남은 사업 예산으로 보도블록을 까는 대신 전시 행정의 일환으로 천리북을 만들게 되었다.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로 큰 북을. 거기까지는 좋았다. 밤마다 누군가 천리북을 쳐대서 민원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북이 있으니까 쳐보고 싶은 건 인지상정. '나'는 후배와 범인을 잡으려고 잠복근무를 한다. 동시에 시장은 최고의 직원과 최악의 직원을 뽑자는 황당한 제안을 한다.


표제작 「근로하는 자세」는 더 가관이다. 환경부 차관을 모시고 장관회의를 떠난 사무관의 짠한 회상기는 결말에 가면 소소한 반전이 숨어 있다. 그렇게 되면서까지 일을 하는 자세라니. 누가 월급 좀 올려줘라. 안 되나. 공무원이라 급여 체계가 있나. 『근로하는 자세』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은 잘 읽히는 장점이 있다. 각종 영상물에 중독된 나를 검은 글자만이 가득한 소설의 세계에서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심심하고 단조로운 책의 배경. 검은 건 글자요 흰 건 여백이라.


소설가는 행정 사무관으로 일하고 있단다. 매일 소설을 썼으리라. 등단을 하고도 청탁이 없는데도 썼단다. 매일 쓰는 자를 누가 당할까. 사유는 부족한듯싶지만 가독성은 있어서 어려움 없이 읽었다. 일. 일하는 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심각하고 어렵고 잘 못하면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우습게 굴었다. 『근로하는 자세』에 나오는 인물들의 직업은 대부분 공무원으로 설정되어 있다. 회의만 드는 회의. 보고하고 계획서 작성하고 다시 반려돼서 쓰고 또 쓰고. 일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게 전부는 아닌. 일의 세계.


「아침이 있는 삶」에 모자 관계는 이상적이다. 아들은 늦은 나이까지 꿈을 버리지 않고 글을 쓰다가 부모가 대신 내준 이력서로 취업을 한다. 국립묘지 안장원인 아들은 아침밥 먹기가 어렵다. 그런 아들을 위해 엄마는 주말이면 반찬을 해서 아들에게 준다. 온갖 재료가 섞인 반찬을 다 먹지 못하고 버리는 아들. 솔직하게 엄마 반찬의 문제점을 말한다. 엄마는 쿨하게 받아들이고. 내가 싸준 반찬 먹는 대신 너는 시나리오를 가져오라고 한다. 주말이면 반찬과 시나리오가 교환된다.


소설은 지나치게 심각하지도 유머가 있지도 않다. 평범한 이야기인데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이 있을 뿐이다. 인물들이 일에서 겪는 어려움, 어이없음과 안타까움의 감정을 느끼며 다시 현실의 살벌함으로 돌아온다. 일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 일하는 자세가 어디 있냐. 살아가는 자세가 중요하지. 생각보다 인성이 덜 된 인간들이 그렇지 않은 척 잘만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집에 돌아와 누워 있어도 죄책감 갖지 말아야지. 오늘 하루 나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으니까. 토닥토닥. 리모컨 손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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