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즙 배달원 강정민
김현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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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작가가 꿈인 정민이 스타업인가 뭐시긴가 하는 회사에서 얄궂은 그림을 그려 번 돈은 모두 오빠의 결혼 자금으로 사라졌다.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엄마는 정민에게 재테크가 무엇인지 보여줄 테니 월급 통장을 맡기라고 했다. 정민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3년을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돈을 좀 모아서 나만의 그림을 그려볼 테다. 꿈이 있었다. 왜. 도대체 왜. 오빠가 결혼하는데 정민이 자금을 보태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정민 자신도 모르게.


글 작가를 섭외해서 정부 지원금을 받았다. 영화 공부를 한다는 글 작가는 정민에게 술을 마시며 서로를 알아가야 한다는 헛소리를 했다. 조짐이 좋지 않았는데 왜 항상 틀린 예감은 맞는 걸까. 글 작가는 먹튀했다. 지원금 천만 원을 고스란히 정민이 갚아야 했다. 서른이 넘은 정민은 온갖 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돌아오는 답은 우리 회사의 인재상과는 맞지 않아. 거절, 거절 그리고 또 거절.


이상 김현진의 장편소설 『녹즙 배달원 강정민』의 주인공 강정민의 사연이다. 이렇게만 들어도 가슴이 답답한데 책을 읽는 나는 고구마 백 개, 구운 계란 백 개를 먹은 답답함이 느껴졌다. 정민이 쌔가 빠지게 모은 돈 오천만 원을 오빠 결혼 자금에 엄마가 갖다 바친 장면에서는 에라이 책을 덮을 뻔했다. 정민은 그 돈으로 한동안 생활비 걱정하지 않고 공부해서 웹툰 작가가 되려고 했다. 인생사, 세상사 내 뜻대로 되는 게 어디 있겠는가. 그리하여 정민은 녹즙 배달원이 되었다.


나이와 연륜과 뻔뻔함과 강철 멘탈로 무장한 여사님들 사이에서 정민은 고군분투한다. '사무실분'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건 예사. 한 달에 오만 원 하는 녹즙 값을 1년 동안 떼먹은 인간도 상대해야 했다. 몰랐다. 소위 '사무실분'들이 이렇게나 싸가지가 없는지를. 소설가 김현진은 2년 동안 녹즙 배달을 했단다. 체험이 잔뜩 묻어 있는 소설은 그래서 현실적이고 슬프다.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오늘에 정민은 술이라는 환각을 들이붓는다.


배달원은 노동자가 아니란다. 특수고용노동관계. 녹즙 값이 한 달이라도 밀리면 돈을 받지 못한다. 정민은 1년 동안 수당을 받지 못했다. 『녹즙 배달원 강정민』은 나와 당신 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딸이라는 이유로 집안의 지원은 꿈도 꾸지 못하고 당연하다는 듯 생활비를 내야 하고 월급은 고스란히 남자 형제에게 쓰인다. 어렵게 면접의 기회가 생겨 한껏 차려 입고 갔는데 업무 질문은 없고 결혼과 애인 유무, 출산 예정에 대한 나아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지지 않는다는 힐난만 받고 돌아온다.


모르겠다. 뭐가 옳은지. 그른지. 전부 틀린 것만 같은 세상이다. 정답은 없고 오답만 가득한 세계. 덜 괴롭고 싶어 소설을 읽는데 더 괴롭고 서글프다. 정민이 개같이 일해서 번 돈을 가족이 털어가서. 녹즙 값 그거 얼마나 한다고 떼먹고 도망가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한테 그런 험한 일을 왜 하냐는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내 칭구 같은 정미니를 힘들게 해서.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었지만 그 속에 두고 온 정민을 생각한다. 유쾌하게 끝을 맺었지만 내일은 또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다.


정민. 나 여기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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