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 한 팀이 된 여자들, 피치에 서다
김혼비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유 없이 우울하고(라고 썼지만 우울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다. 그걸 외면하고 싶을 뿐) 누가 우는 것만 봐도 울음이 터져 나온다면 김혼비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망설이지 않고 권할 것이다. 초진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정신건강의학과를 가기 전에 유튜브를 보면서 불안할 때를 검색하기 전에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 들어가 책을 주문해 보기. 걸을 수만 있다면 동네 서점에 가서 바로 책을 사서 보기. 무슨 책?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보자. 그러니까 나는 이 책을 2018년 7월 2일에 샀더랬다. 재밌고 괜찮다고 해서 사 놓기는 했는데 제목에 '축구'가 들어가서 읽기를 망설였다. 베이징 올림픽 때 이승엽이 한일전에서 역전 투런홈런을 치는 걸 보고 반해서 야구에 깊이 빠졌다가 나온 적이 있다. 야구 룰을 알기 위해 책도 사서 봤다. 야구 경기를 열심히 보고 집순이 주제에 경기장에도 갔다.


축구는 그런 순간이 없어서 국대 경기가 있어도 그냥 하나보다 한다. 알고 나면 축구 룰은 야구 룰보다는 쉬울 텐데. 괜히 겁을 먹고 축구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어려운 책이 아닐까 생각했다. 혹시 나 같은 바보가 있을 수도 있으니 미리 말해둔다. 이 책은 어렵고 난해한 축구 룰은 설명하지도 축구의 유구한 역사를 파헤치지도 않는, 호나우두의 경기 장면을 보고서 반해버린 한 여성의 축구 입덕기를 기록한 책이다. 감동과 재미와 눈물은 덤이다.


책에서 김혼비 그녀는 혼자의 시간을 사랑하는 초개인주의자라고 밝힌다. 그런 그녀가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그야말로 사람과 부대끼는 운동인 축구를 시작한다. 축구화와 축구 양말을 사서 태그를 뗄까 말까 망설인다. 가야 하나. 토요일 오전의 늦잠을 반납할 만한 일이 될까. 주저와 망설임의 번뇌를 거쳐 그녀는 축구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야말로 그곳은 환대의 세계.


신입이라고 함부로 하지 않고 이상한 텃세를 부리지도 않는다. 대신 입단한지 1시간 10분 만에 연습 경기에 출전한다. 축구 경력 40분인 김혼비는 6번 할아버지를 마크하는 역할이 주어진다. 보자마자 반말로 말을 거는 6번 할아버지와 경기를 뛴다. 반말. 외모 품평. 화내기. 6번 할아버지는 김혼비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서로를 딸과 아버지라 부르는 난데없으나 호쾌한 일들이 벌어지는 첫 경기를 마친다.


저질 체력의 앞으로도 평생 이불과 한 몸이길 원하는 내가 축구를 할 일은 없다.(고 쓰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 좋아하는 일에는 없던 사회성도 발현되려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읽으면서 내가 취한 감동은 이런 거였다. 주중에는 열심히 일을 한다. 직업인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고. 토요일이 되면 가방을 싼다. 수건과 양말과 선가드와 축구화를 넣는다. 산책 나온 개도 조용히 짖는 운동장으로 모인다.


시작한다. 운동장을 뛰고 볼 연습을 하고 이상한 비유를 갖다 대면서 파이팅을 외치는 감독의 이야기를 듣는다. 내가 흘린 땀방울인지 상대가 흘린 땀방울인지 모를 땀으로 범벅이 된 유니폼을 갈아입기도 전에 서로의 경기에 대해 설전을 나눈다. 누구의 엄마, 딸, 부인이 아닌 등 번호와 이름으로 불리면서. 순수하게 노력으로 얻은 칭찬의 말을 듣고 나면 다음 단계가 펼쳐진다. 김혼비가 골을 넣기 위해 애쓰다 자책골을 넣는 장면에서 갈빗집에서 서빙을 하다 '얼결에' 축구팀에 입단하는 미숙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동안 나를 갉아먹었던 두려움과 공포의 실체는 무엇이었던가.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젠장,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애초에 없던 걸 네가 만들어 냈던 거야 말해주었다. 우린 어차피 다 죽을 텐데. 까짓것 해보고 싶은 거 있으면 하고 하기 싫은 건 죽어도 하지 마,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한 건 아니고 김혼비가 호나우두의 발재간에 반해서 축구에 입덕하고 여자들이 어쩌다 축구하게 된 썰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거였다.


'무언가를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상상도 못하고 살아오다가 그 현실태를 눈앞에서 본 순간, '나도 하고 싶다.'를 넘어서 '내가 이걸 오랫동안 기다려 왔었구나.'를 깨닫게 될 때 어떤 감정이 밀려드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어제 진상 손님들 두 테이블이나 있어서 진짜 힘들었는데 오늘 아침에 축구 올 생각하니까 왜 짜증도 별로 안 나냐. 하하하. 왜 그런 거 있잖아? '야, 너희 내가 그냥 보통 식당 이모인 줄 알겠지만 알고 보면 나 축구하는 여자다 이거야!'라고 속으로 생각하면 괜히 어깨도 쫙 펴지고!"라는 호탕한 답이 돌아왔다.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中에서)


일을 하면서 모욕의 순간이 올 때 나 틈틈이 책도 읽고 글도 쓰는 여자야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없을 만큼 기분이 더러웠기 때문이다. 축구는 그게 가능한 거구나 미숙 언니의 말을 들으면 혹하기도 한다. 나 축구해볼까. 자책과 후회의 감정이 들 수도 없게 운동장을 달리고 땀을 흘려볼까.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 아직 죽기는 싫으니까 나 대신 축구하면서 성장의 서사를 써 내려간 김혼비의 웃기고 유쾌한 이야기를 이불 속에서 읽는 것으로 축구 한 기분을 낸다.


타인에게 가 아닌 나 자신에게 당당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내본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의 마지막 문단을 읽으면서 뻥 아니고 눈물이 났다. 작금의 내 상황을 김혼비는 알고 있었던가. 김혼비는 알고 있을까. 자기가 축구 한 이야기를 읽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고 있을 줄을. 달 같은 축구공을 뻥 차고 날렸는데 가슴으로 받은 그 공 안에는 호쾌한 위로가 있어 꽁꽁 숨겨 두었던 상처를 찾아 터뜨려 주었단 걸. 김혼비가 알았으면 좋겠다. 누구도 내게 실패했고 못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잘했다고 괜찮다고 고생했다고 다독여준다.


여자들이 축구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여자들이 서로를 격렬하게 긍정하고 걱정해 주는 감동 실화를 다룬 책이다. 그러니 어서들 사 보시게. 뭐라구요? 나만 아직 안 읽은거라구요? 이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