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사람
최정화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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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악스트는 글씨가 작으려나. 악스트가 처음 나왔을 때 놀랐던 건 가격이었다. 2,900원. 썩은 비유지만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얼마나 흥분했던지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은 친구에게 악스트를 사서 보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안부 인사조차 생략한 채 싼값의 문예지가 나왔으니 사서 보라는 연락을 받고 당황했겠지. 그 후로 그 애가 책을 샀는지 안 샀는지는 모른다. 나는 구독을 했고 가격이 오른다는 편지를 받고 구독을 해지했다.


또 썩은 비유인데 카페 가서 커피 한 잔 덜먹으면 구독해서 볼 수도 있는데 해지했다. 처음에는 열심히 읽었다. 글씨가 작아도 이 값에 이게 어디야 하면서. 구겨져도 상관없었다. 서평에서 소개한 책을 찾아 읽고 감각적인 사진 옆에 실린 글은 근사해 보여서 필사도 했다. 그때 읽은 최정화의 「도트」가 있었다. 무오. 어딘지 이곳의 느낌이 실리지 않은 이름을 가진 인물이 등장했다.


원래 책은 사 놓고 잊어버리는 맛이 있다. 눈은 떴는데 일어나기는 싫어서 전자책 리더기를 켰다. 리더기는 넷플릭스 같다. 그 안에 볼 건 많은데 막상 보려고 하면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앞부분만 열어 보다가 꺼버린다. 무얼 읽을까 고민하다가 시간이 간다. 시간 내서 꼭 읽어야지 하면서 잠자고 있던 책들을 불러왔다. 최정화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무오.


악스트에서 연재되었던 소설 「도트」는 『없는 사람』으로 새롭게 나왔다. 나는 그게 그건 줄도 모르고 최정화의 신간이 나왔네 하면서 사놓고. 잊어버리고. 무오는 탈취제를 사 오는 길이었다. 이부의 심부름이었다. 나는 수업하다가 불려 나와 잔돈을 바꿔 오라는 원장의 심부름을 종종 했다. 같이 일했던 선생은 그걸 왜 본인이 하지 않고 나한테 시키는지 모를 일이었다고 했다. 원장의 친구였으면서. 그럼 그 순간에 말을 하지. 네가 하라고.


노진에서 택배 상하차 일을 하던 무오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바뀌는 일이었다. 힘들어서 힘들고 죽을 것 같이 힘들어서 사람들은 자주 바뀌었다. 그 일을 무오는 이 년 동안 하고 있었다. 껄렁껄렁하게 말하는 이부가 무오를 찾아왔다. 딱 봐도 이런 곳에서 일을 할 사람 같지 않았다, 이부는. 자신과 일을 하자고 고수부지에 데려갔다. 물이 어느 쪽으로 흐르는지 이상한 질문을 하고 사이다를 사줬다. 처음으로 무오에게 관심을 가져주었다.


무오의 일은 단순했다. 도트라고 명명된 자를 따라다니면서 위치를 확인해 주는 일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 단순한 이유. 자아실현이니 사회성 확립이니 일의 의미를 떠들어대지만 그런 건 소용이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니까. 일을 한다. 하다 보니 열심히가 된다. 일이 익숙해지고 할만할 때쯤 회사 사정이 어려우니 나가란다. 외국 회사에 회사를 넘기겠단다. 안 된다. 우리 기술만 빼가고 먹튀할거다. 해고 철회를 해라. 해고자들을 복직시켜라.


노조원들은 시위를 한다. 무오는 노조원으로 위장해 시위를 불법으로 만들고 무력화하는 일에 투입된다. 도트는 지부장. 그가 방심한 틈을 타서 틈이 보이면 동영상을 찍어 배포하는 일도 한다. 틈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없는 사람』이라는 제목이 훨씬 좋았다. 무오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제목이라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실에는 꽤 존재한다. 일은 하지만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


무오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에 빠진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는 단순한 이유로 설명되는 걸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칠십일에 달하는 시간을 노조원들과 먹고 자면서 무오에게는 자신의 삶을 생각할 기회가 생긴다. 나는 어떻게 살아온 존재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오후 두 시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 전언은 잘못되었다. 늘 그렇게 잘못 살고 후회한다. 후회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너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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