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을 본다 문지 에크리
신해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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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욱의 산문집 『창밖을 본다』는 空冊(공책)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空冊(공책)의 이야기로 끝난다. 출판사를 폐업한 친구 김재옥이 그것도 기념이라고 만든 공책. 신해욱은 공책 한 권을 얻어다 책상 위에 놓아둔다. 질 좋고 두꺼운. 어떤 내용이든 써주라. 하는 얼굴로 공책은 책상 위에 방치된다. 나 역시 마음이 허름한 날에는 문구사에 들러 공책을 사곤 했다.


스프링이 달린 것부터 없는 것 줄이 있는 것 없는 것. 그렇게 모으고 모은 공책이 책꽂이에 가득 꽂혀 있었다. 어느 날은 보기 싫어져 아이들에게 나눠 준 공책들. 쓰는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자의식은 그냥 사는 사람으로 굳어져 갔다. 쓰는 것보다 사는 게 더 어려운 나날들. 유명인이 쓴다는 공책만 있으면 유명인이 앉는다는 책상만 있으면. 엉뚱하게도 소비를 하면서 쓰고자 하는 욕망을 달랬다. 잘 달래지지도 않고 매번 실패하면서.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책꽂이를 하나 주워왔다. 예전에 다 갖다 버렸는데. 없으니까 허전해져서. 다시 사기는 좀 그래서. 퇴근하고 분리수거장을 돌아다녔다. 아이들 전집을 비치해 놓는 용도로 쓰였는지 야광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책꽂이. 에프킬라를 뿌려 가며 스티커를 떼어냈다. 일의 스트레스를 책 사는 것으로 풀었던지라 신간 시집이 많았다. 표지를 보이게끔 진열해 놓고 한동안 멍하니 들여다 보기만 했다.


책을 꽂아 놓고도 넷플릭스를 봤다. 동생의 결혼식이 끝나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아래쪽에 꽂힌 신해욱의 『창밖을 본다』를 그야말로 무심코 꺼내들었다. 자본주의의 끝판왕이라는 결혼식을 감상 또는 참석하느라 지쳐버렸다. 흰 종이와 검은 글자라는 단순함이 필요했다. 시인도 별 사람 아니군. 하는 짓이 나와 똑같군. 공책의 이야기는 매혹적이었다.


해와 별이 없어도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지 않는 사람. 남극과 북극의 지구 자기장에 신체가 반응하지 않는 사람. 걸어 다니는 나침반 같은 사람. 왼손으로 네모를 그리며 오른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듯 세계의 동서남북과 내 몸의 전후좌우를 또렷이 가를 수 있는 사람. 절대음감이나 절대방향감이 있다면 절대성격을 지닌 사람도 있을까. 누구와 있는가, 어떤 환경을 살아가는가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 주어진 자리나 역할에 따라 태도가 변하지 않는 사람. 내면의 나침반을 지닌 사람.

(신해욱, 『창밖을 본다』中에서)


창의 안과 밖의 차이는 무엇인가. 시인은 창 안쪽에서 매번 바깥을 응시한다. 심야버스와 열차에 앉아서도 창밖을 본다. 풍경에 뛰어들 수 없는 사람. 시인의 숙명은 풍경을 관조하고 직시할 수 있으면 직시하고 외면할 수 있다면 외면한다. 쓰고 싶으면 쓰는 건 아니고 쓰고 싶은데도 쓰지 못하는 사람. 써야 할 것이 있어도 망설이는 사람. 견딜 수 없다고 여길 때는 화장실에 앉아 메모 앱을 열어 욕을 썼다. 참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하던 걸 내뱉을까 봐, 겁나서.


空冊을 가방 안에 넣어 다니느라 가방은 늘 무거웠다. 앞의 몇 페이지만 써 놓고 책꽂이에 다시 꽂아 넣는 짓을 반복한다. 김소연 시인은 산문에서 어느 날 갑자기 책상 앞에 앉아 시를 쓸 날이 올 거라는 이상한 희망을 심어주었다. 신해욱의 『창밖을 본다』는 죽은 언어가 되어 버린 詩라는 걸 불러내어 준다. 어디 있었니. 생각을 자주 하지 말고 신나는 게 있으면 신나게 즐겨야 한다. 창밖을 보는 자의 지침이다.


엉성하면 어떤가. 누가 보거나 말거나 일단은 내가 재밌을 것. 잘하려고 애쓰느라 나를 괴롭히지 말 것. 퀄리티에 연연하지 말 것. 만드는 재미를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 그런 자세를 아마추어 정신이랑 부르는 걸 텐데 쟤들은 무슨 정신 같은 거 없이도 신나고. 같이 놀지 않고 창밖으로만 봐도 좋군.

(신해욱, 『창밖을 본다』中에서)


창 안에서 창밖은 조용하고 근사하고 신비롭기만 하다. 같이 놀지 않아도 신남이 경쾌함이 느껴지는 자리. 이상한 유머를 던져 놓고 나는 매번 웃었다. 아이들은 웃지 않고 웃는 나를 보기만 했는데도. 그래놓고 나는 나만 즐거우면 됐다고 뻔뻔하게 또 웃었다. 웃었다. 웃어서 즐거웠다. 끝이라고 여겼다가 그건 아니고 새로 시작이다고 외치는 삶은 기괴하다. 비어 있는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창의 바깥을 힐끔거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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