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버씨의 죽음 - 갈아넣고 쥐어짜고 태우는 일터는 어떻게 사회적 살인의 장소가 되는가
김영선 지음 / 오월의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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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다소 많이 어두운 이야기가 담긴 리뷰입니다. 지금 몹시 힘들거나 지친 분들은 읽기를 피해주세요. 좋았던 기분도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하는 심정으로 그만둔다고 말하고 후임자 오면 인수인계까지 하겠다고 했을 때. 부탁이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의 단점과 내가 그만두게 된 이유를 글로 적어달라고. 나는 해코지가 무섭다고 했다. 절대 그럴 일 없고 그렇게 되면 종이를 찢어버리겠단다.


후임자가 와서 오래 근무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생겼을 때 그를 내보내기 위한 용도로 쓰겠단다. 자신은 앞날을 미리 걱정하는 편이라서 그런다고도. 내가 힘들어서 미치겠다고 죽을 것 같다고 말한 건 다 뭔가. 견딜 수 없어서 나가는 사람이 있는데 무슨 증거가 필요할까. 참으로 이기적인 부탁이었다. 글 쓰는 거야 누워서도 쓸 수 있으니까. 알았다고 했다.


떠올랐다. 대장금의 명대사. '저는 제 입에서 고기를 씹을 때 홍시 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 그냥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 힘들다. 어찌 힘드냐. 힘들어서 힘들다고 하는데 어찌 힘드냐고 물으시면 힘들어서 힘들다. 라고는 할 수 없어서 전부 이야기했다. 일이 생기면 다급해져서 고함치고 늘 윽박지르듯 말한다.


일을 주고 1분도 안 지났는데 다 했냐고 묻는다.(계속 이러니까 나를 놀리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실수를 하면 왜 잘못했냐, 뭐가 잘못됐냐. 이유를 알아야 하지 않겠냐. 집요하게 묻는다. 일하고 있는 거 뻔히 아는데도 옆에 와서 뭐 하냐고 계속 묻는다. 다른 사람 앞에서 하대하고 무시하듯 말을 한다. 반말은 기본 장착. 빨리하라고 재촉해서 주눅 든다. 안 그래도 처음 하는 일이라 서투른데 자꾸 그러니까 실수를 반복한다.


책임져야 할 것 같은 일이 생기면 나에게 떠넘긴다. 일의 주체를 자신에게서 나로 넘긴다. 교묘하게. 나를 비서 부리듯 대한다. 결정적으로 자신의 비위를 맞추는 게 나의 업무라고 윽박질렀다. 내 성격을 네가 다 이해해야 한다고. 대체 얼마나 편하게 일하고 싶어서 그러느냐. 그동안 편한 일만 했느냐. 너무 힘들어서 애인한테 말했더니 직장으로 애인이 찾아오는 막장 드라마에도 안 나올 것 같은 장면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러도고 변명만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하고자 한 사람 앞에서 자신의 변명만을 무한 반복했다. 고칠 수 없단다. 자신의 비위를 맞추면서 일을 하라니. 나는 공부하고 자격증 따서 취업을 했다. 일을 해서 돈을 벌려고.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며 돈을 벌고 싶은 게 아니다. 상꼰대. 내가 그런 소리를 듣고서 네 네, 돈 버는 거 다 힘들죠, 그렇게 해서 돈 버는 거죠. 수긍하고 순응하면 계속 이런 더러운 세상이 될 것 같아, 세상은 점점 나빠지고 나쁜 놈들이 웃으며 살게 될 것 같아. 그만둔다.


김영선의 『존버씨의 죽음』을 읽어가다 나는 그간 내가 느낀 감정이 실재하는 것이었구나 안도했다. 호흡 불안, 고립감, 소외감, 통증, 불안감이 나를 지배했다. 퇴근을 했어도 쉬고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잊어버리고 쉴 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일을 하는 동안 '나는 감정이 없다'를 속으로 되뇌었을까. 나는 인간인데. 감정이 있는 인간인데. 비인간으로 만들면서까지 일을 해야 할까. 울고 싶은 심정으로 일을 했다. 자기 편한 쪽으로 업무를 분담하는 꼴을 보고서도. 일이 안 되면 왜 안되는가 집요하게 추궁하는 걸 들으면서도. 나는 감정이 없다, 감정이 없다를.


기질론은 낡아빠져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본이 동원하는 여전한 프레임으로 언제나 강력한 힘을 발휘해왔다. '쟤는 원래 예민해서 그래' '나약해 빠져가지곤' '정신 상태가 글러먹었어' '완벽주의 성향' '유리 멘탈·두부 멘탈·쿠크다스 멘탈(유리, 두부, 쿠크다스처럼 부러지기 쉬운 멘탈)' '멘존약(멘탈 존나 약함)' 등. 한 노동자의 상태가 일터의 다양한 연관 고리에 영향받아 구성되는 산물이라는 사실을 탈각시켜버리고 오로지 그 개별 노동자의 원래 속성인 것으로 여기게끔 하는 일종의 물신주의와 다르지 않다.

(김영선, 『존버씨의 죽음』中에서)



존버란 무엇인가. 존나 버티다의 약자. 어떤 일에서든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자가 이긴다며 버팀을 치켜세워주는 말로 쓰인다. 근데 버티면 승리할까. 다들 그런다니까 존버 해봐. 하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이 사회에서는. 『존버씨의 죽음』은 일터에서 죽어간 존버씨와 죽어가는 산 자 존버씨의 행적을 쫓는다. 과로 죽음과 과로 자살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논문을 인용하면서도 가독성을 잃지 않는 책이다. 일하러 갔는데 왜 죽는단 말인가.


밑줄을 그은 부분은 나의 사고와 표현력이 부족해 말하지 못한 고통을 대신 말해주고 있는 부분이었다. 나의 성격이 약하다는 것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내가 더 강해져야 한다고. 나는 잘 웃고 잘 떠드는 사람이었다. 일을 시키지 않아도 찾아서 하는 부류였다. 바뀌고 있었다. 웃지 않고 말하지 않으며 일을 줘도 하기 싫어서 대답조차 침묵을 가진 뒤에 했다. 내가 봐도 한심하게 바뀌고 있었다. 일을 하다 약국으로 달려가 안정제를 사 먹었다. 끝나고도 사 먹었다.


궁금한 것은 그 힘듦의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공감되는가였다. 고용불안을 매개로 경쟁을 가속화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스템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의 무게에 눌려 고립되고, 타자의 고통에 다다르는 데 어려움을 겪어가 심지어 무감각해지는 경향을 보이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었다.

…베라르디는 무감각과 비공감을 우리 시대의 윤리적 재양이라고 진단한다.

(김영선, 『존버씨의 죽음』中에서)


안 믿는 것 같아서 녹음까지 해서 들려줬다. 몇 십분의 긴 녹음을 듣고도 어떤 말도 하지 않더라. 힘들었겠네. 한 마디를 바란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욕을 하지 않아서? 때린 게 아니어서? 그랬다면 나는 바로 경찰에 신고했지. 녹음 속의 언어들은 우리 사회가 가진 고질적인 문제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언어였다. 사는 게 팍팍해서 남의 어려움은 보지 못하게 된 건가. 자신이 겪은 게 아니라서 공감이 되지 못하는가. 무감각과 비공감의 자세로 살아가는 자에게 나는 무기력했다.


일하는 동안 책을 많이 샀다. 기분 나쁨과 몸의 힘듦을 풀 데가 없어서. 예전보다 몇 십만 원 더 벌었는데 더 썼다. 벌어도 버는 게 아니었다. 산 책의 제목이 가관이다. 『존버씨의 죽음』, 『아주 편안한 죽음』, 『말론 죽다』, 『평범한 인생』. 사람이 힘들어서 죽겠다는데 원래 그 사람은 그러니까 변하지 않으니까 참고 가자는 말인지 방귀인지 모를 소리를 듣는 동안 몸에 이상이 왔다. 눈을 자주 깜빡이고 고개를 자꾸 갸우뚱하고 키보드를 치는데 손이 떨리는. 틱 증상이었다. 호흡이 불안해지면 화장실로 도망가 숨을 크게 쉬었다.


그래서 존버하지 못했어.


『존버씨의 죽음』의 마지막에는 과노동 저지의 방법이 나온다. 노동조합, 기업, 개인이 해야 될 지침을 알려준다. 노동조합과 기업이 해야 할 일은 모르겠고 개인이 해야 할 일에 밑줄을 그었다. 연차휴가는 할 수 있는 한 다 챙겨 쉬라는 말. 내가 한 달 만근해서 생긴 연차 쓰겠다는 것도 눈치 주면서 못 쓰게 해놓고 이제서야 선심 쓰듯 연차까지 사용해서 쉬라는 말. 이런 걸 원하는 게 아니었냐는 뒤끝 쩌는 말. 이틀만 견디면 된다. 이틀. 이틀만 존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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