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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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다리고고기다리던 백신 2차 접종까지 마쳤다. 기쁘다. 기뻐. 경사 났네. 경사 났어. 최근 들어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잔여 백신이 있을까 봐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숫자 0이 뜰 때마다 나중에 차례가 되면 맞지 뭐 애써 아쉬움을 기대로 돌려놓았는데. 순서가 돼서 예약을 하고 친절하게 맞으러 오라는 문자를 받고. 병원에 가서 문진표를 작성하고 얌전히 내 이름이 호명되길 기다렸다. 그렇게 1차와 2차까지 접종을 끝마쳤다.


1차 때보다 2차가 더 아팠다. 몸살감기에 걸린 것처럼 근육통이 오고 어지러웠다. 진통제 세 알을 먹고서야 괜찮아졌다. 3일 째인 오늘, 팔만 욱신거리고 괜찮다, 다 괜찮다고, 헛소리를 섞은 개소리를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할란다. 나는야 백신 접종자니까.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일상생활이 일상생활이 아니게 됐을 때 오늘을 희망할 수 있었나. 아무래도 그건 먼 미래의 일쯤으로 여겨 우선 나부터 조심하면서 지내야지 했다.


원래도 잘 안 돌아다니지만 더 집에만 있는 사람이 됐다. 내가 움직이면 내가 움직여서 혹시나 병을 옮길까 봐 또는 병에 옮을까봐 두려움이 가득했다. 코로나19 사태 초기에 보내오던 안전 문자에서 확진자 동선을 보며 긴장했고 마음을 졸였다. 슈퍼, 미용실, 학원, 택시, 버스, 회사. 그곳은 늘 내가 우리가 다니던 곳이었고 다녀야만 했던 곳이다. 일상을 격리 당했고 내내 불안한 마음으로 오늘까지 지냈다. 도서관에 가는 걸 좋아했는데 어느 날 확진자가 다녀갔으니 검사를 받으라는 문자를 받고(동선이 겹치지는 않았다.)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는 횟수를 늘렸다.


황정은의 산문집 『일기日記』는 코로나19 시대를 사는 소설가의 하루하루가 담겨 있다. 황정은의 문체를 좋아한다. 생략과 생략으로 이어진 문장. 소설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요약하기보다 인물의 마음을 짐작하는 것으로 소설 읽기를 마칠 수 있는 소설을 쓰는 황정은. 2004년 1월 1일, 신춘문예 당선작이 실린 신문을 버스터미널에서 샀다. 그리고 발견한 황정은의 소설, 황정은. 누런색의 공책에 데뷔작 「마더」의 감상을 썼다. 앞으로 응원해야지. 소설집이 나오면 사야지.


『일기日記』를 읽다가 끝부분을 읽어가다가 크게 놀라고야 말았다. 내가 아는 황정은이 맞나 싶어서. 이 말은 잘못됐다는 걸 안다. 나는 인간 황정은을 모른다. 다만 그가 쓰는 소설을 읽고 어떤 부분을 짐작하는 정도이다. 이 책은 표지에 '황정은 에세이'라고 적혀 있는데. 소설이 아닌데. 왜 나는 『일기日記』를 소설로 읽고 싶을까. 차라리 소설로서 허구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호를 해주고 싶은 걸까. 그런 마음이 들어서 아픈 책이었다.


소설 쓰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것은? 황정은의 대답은 허리와 척추 건강이다. 의자에 앉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의자에 앉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먹고 자는 시간 외에 책상에 앉아 글을 써야 한다면 하루나 이틀이 아니고 내내 그래야 한다면 힘들고 막막한 일이 될 수 있다. 뭣 모르던 시절, 사무직이나 할까 그랬다. 역지사지를 모르고서. 남이 하는 일은 쉬워 보이는 같잖은 생각으로. 세상에는 내가 하는 일이 제일 어렵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만이 고되다. 사무실로 출근하는 모든 이들이여, 힘을 내시길.


산보, 파주, 동거인, 세월호, 일기, 작약, 종이책, 전자책, 문장이라는 단어를 『일기日記』를 읽으면 만날 수 있다. 하루 종일 숫자를 들여다보고 숫자를 생각하는 내가 혹은 당신이 『일기日記』를 펼치게 되는 행운을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도대체 쓰는 사람도 이해했을까 싶은 문장이 아닌 주어, 목적어, 서술어로 이루어진 기본적인 문장으로 담담한 어조로 우리가 함께 공유했던 어려운 시절을 들려준다. 마스크를 써야 한다고 마스크를 쓴 채로 수업을 하면서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의아해하던 시간을 지나 마스크가 한 몸이 된 듯 살아가는 지금까지 힘든 티를 조금만 내면서 잘 버티고 있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 만큼 힘든 티를 내는 것. 많이 힘든 건 일기에 쓴다. 누구나 볼 수 있는 인터넷 공간이 아닌 곳에 일기를 쓴다. 연필을 눌러 공책에 쓰거나 비공개로 쓰면서 혼자만 들여다본다. 안 힘들다고 했지만 사실은 너무 힘이 들어 하루를 포기할까도 마음먹은 우리, 나였다. 소설가 황정은의 일상도 다르지 않았다. 사랑하는 조카를 자주 보는 대신 건강과 안녕을 빌어주고 좋은 책상을 사서 보내준다. 2014년 4월 16일이 흐르고 매해 4월이 되면 목포로 떠난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나의 안녕은 곧 당신과 우리의 안녕이라는 걸 배웠다. 전 국민 백신 접종률이 70%를 넘었다는 뉴스를 보며 벅차하면서 아프다고 징징대는 나를 위해 비싼 샤인 머스캣을 사서 안겨주는 아름다운 친구의 얼굴을 보면서 일기를 쓰는 오늘이 있다는 것에 행복과 안도를 느낀다. 무사한 오늘을 기록으로 남긴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지랄맞은 일에 화를 내지 않고 심호흡을 하고 참아내면서. 좋게 말하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제발 짜증이나 내지 말아라. 네가 하기 싫은 걸 왜 나에게 시키는 건데. 이럴 땐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다행이다. 썩은 내 표정을 반은 가릴 수 있으니까. 오늘도 나는 나의 본성(일희일비하고 짜증쟁이에 소심하고 불안한)을 드러내지 않고 바닥에 겨우 남은 사회성을 긁어모아 무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잠깐 웃기까지 했다. 집에 돌아와 황정은이 친필로 쓴 '평안하시기를'이라는 문구를 들여다본다. 감당하지 못할 일이 닥쳐도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일상인인 황정은이 말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한다. 내일을 살아야 하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한 가지, 그건 나의 잘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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