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황이 바뀌었다. 조남주의 소설집 『우리가 쓴 것』에 실린 소설 중 웃기고 기막히고 서글프게 다가온 소설은 「미스 김은 알고 있다」였다. 예전 같았으면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단 말이지 의심스러웠을 텐데. 이제는 아니다. 오히려 소설 속 상황은 약하고 순화된 것임을 알아채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래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새삼 감탄했다. 어찌어찌 죽지 않고 버티며 살아나가는 나 자신과 모든 이들의 시간을.


여성이 처한 불합리한 현실을 조망하는 조남주의 소설을 누가 뭐라든 굽히지 않는 문학적 소신을 가진 자의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따라 읽고 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창의적인 것이다는 말이 있고 나서야 나의 이야기는 부끄러운 게 아님을 자각할 수 있었다. 조남주가 그리는 여성의 이야기는 과장 혹은 지나침이 아니라는 것 또한. 누굴 욕보이거나 추궁하거나 비난하는 의도에서 쓴 것이 아님에도 소설은 문제가 되었다. 문제가 아님에도 문제로 만들어 문제를 낳게 하는 악순환.


소설집에 실린 여덟 편의 이야기는 여성 화자가 중심이다. 10대에서 80대까지 다양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설을 읽는 누구라도 감정과 상황을 이입해서 읽을 수 있다. 누구라도에는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경험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한다. 상대의 처지가 되어 볼 수 있다는 장점. 어찌어찌 한 달 업무를 마무리했다. 가장 중요한 급여 정산을 하고 명단을 이메일로 보냈다. 확인하시고 각각의 계좌로 급여를 보내달라고 하는.


바로 몇 초 만에 반송 메일이 왔다. 인수인계 자료에 적힌 메일 주소를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확인도 안 하고 급하게 보낸 게 아닌데. 몇 번이고 숫자와 알파벳을 확인했는데. 왜 돌아온 건지. 이럴 때는 혼자 고민하지 말고 전화를 걸어야 한다. 메일을 보냈는데 반송이 됐다. 주소가 맞냐. 물었다. 적힌 게 틀렸다. 소문자 i이 아니라 숫자 1 이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잘못 적어 줄 수도 있지. 그러나 메일 주소는 여러 곳에 틀리게 적혀 있었다. 거래처 목록과 인수인계 자료에도.


또 어떤 날에는 분명히 입력해 놓은 자료인데 전산에는 사라져 있었다. 내가 입력해 놓고 삭제를 눌렀을까. 그러기에 나는 끙끙대며 입력해 놓은 기억이 있는데. 알 수 없다고 넘어갔지만 찜찜했다. 「미스 김은 알고 있다」를 읽고서야 그간의 미스터리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일은 가장 많이 하는데 직급은 없고 심지어 이름도 모르는 회사 내의 전설 같은 인물 미스 김의 서사는 나에게 황당함이 아닌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속 시원한 납득을 선사했다.


병원 홍보대행사에서 온갖 일을 하지만 결국 그것 때문에 잘리는 미스 김의 퇴사 이후 회사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공유 폴더에 있는 파일들의 상태가 이상해지고 국어사전이 사라지고 리모컨을 감싸고 있던 랩이 벗겨져 있고 음식점에서 받은 쿠폰도 사라져 있는. 경찰에 신고하기도 애매한 분실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은 없다. 모두들 미스 김이 CCTV를 피해 들어와 그렇게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을 말하진 않는다.


이른바 미스터리 서스펜스 회사물인 것이다, 「미스 김은 알고 있다」는. 누구의 악의인지 알지만 함부로 악의에 접근할 수 없다. 작가의 말에서 조남주는 이 소설을 수정하는 과정이 즐거웠다고 밝힌다. 매일 출퇴근하던 시절의 분노와 의문을 담았다고. 정신 건강에 안 좋은 거 알고 있지만 매일 나는 평일 9시에서 6시까지의 일을 떨치지 못하고 집까지 가져와 스스로를 괴롭힌다. 벗어나고 싶다. 『우리가 쓴 것』은 네가 느꼈던 감정은 망상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소설집에는 지금의 사람들이 겪는 불안과 공포를 담아낸다.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까지 이어지는 생존에의 공포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조남주는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마스크를 쓰고 살아간 지 이 년째.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어떻게 지냈을까. 마지막 단편 「첫사랑 2020」은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지금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지금은 과거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땐 그랬지를 말하지 못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네를 힘없이 말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질지 모른다.


그래도 살아간다. 아이들은 마스크 안에 감춰진 웃음을 찾아내고 헤어지는 마당에 그때 준 마스크를 돌려달라고 찡찡대고 그걸 본 담임 선생님은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 나는 좀 무섭다. 아니 많이 무섭다. 내가 하는 일이 틀리고 실수가 되고 잘못으로 확인될까 봐.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번질까 봐. 하루에도 그만두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열두 번도 넘게 든다. 이제는 안다. 포기하는 건 용기가 필요하고 어려운 일이라는걸. 이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멈추는 이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다.


일단은 계속한다. 내가 멈추지 않아도 상황이 강제 종료를 알릴 수도 있기에. 그때가 되면 멈춘다. 「여자아이는 자라서」의 이야기는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여자아이는 자라서 포기와 계속 하기를 망설이는 사람이 되었다. 내 곁에 소설 속 인물들 같은(할머니, 엄마) 사람은 없지만 어찌어찌 자라서 살아가고 있다. 어찌어찌의 시간에는 소설이 존재한다. 연락이 닿지 않아도 카드 사용 내역이 간간이 날아오는 것으로 생사를 확인하며 서로의 안녕과 다정을 빌어주는 소설 속 세계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