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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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아침형 인간이 된 지 석 달.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보인다. 집을 나서면 횡단보도 앞에 깃발을 들고 서 있는 어른이 있다. 일명 녹색 어머니회. 어머니회라고 하지만 남자 어른도 있다. 깃발과 경광봉을 든 두 어른은 아이가 지나갈 때마다 에스코트하듯 아이를 학교 쪽으로 인도한다. 조그만 몸에 큰 가방을 멘 아이들은 마스크를 꼭꼭 쓰고 있다. 올해는 초등학교 1, 2학년은 매일 등교를 할 수 있다니 다행이다. 학교를 갈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이 될 줄이야.


단지 공부만 하러 학교에 가는 것이 아님을 절실하게 느낀 2020년이었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고 함께 밥을 먹고 놀기도 한다. 체육시간에는 강당이나 운동장에서 모여 뛰어다닌다. 운동회와 소풍날에는 모여 앉아 김밥을 나눠 먹는다. 이런 일을 작년에는 하지 못했다. 모든 행사가 취소되고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해야 했다. 아동 센터도 문을 열지 않아 아이들은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학원에 갈 수 있는 아이들은 학원에 갔지만 그마저도 코로나가 심해지면 휴원을 해야 했다.


내내 안타깝고 서글픈 한 해였다. 2021년은 좀 다를까. 요즘 내가 아침에 보는 풍경은 어른이 아이를 지켜주는 따뜻함이 있었다. 어른과 함께 길을 걸어도 아이들은 손을 들고 걸었다. 배운 걸 실천하는 똑똑함. 엘리베이터에서 학교나 유치원에 가는 어린이를 만나곤 하는데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한다.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나서 오늘 나도 한 가지를 실천했다. 그전에도 인사를 받으면 고개를 숙이거나 안녕하세요라고 하기는 했다.


어린이에게도 본격적으로 존댓말로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어야겠다는 결심과 실천. '어린이가 있다'라는 진실을 『어린이라는 세계』는 깨우쳐 주었다. 어린이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 일하다가 독서 교실을 열어 어린이와 수업을 하는 김소영의 에세이를 읽는 내내 부끄럽고 뭉클했다. 어린이라는 시간을 거쳐왔지만 그때의 기억을 다 잊은 듯 항상 어른이었던 것처럼 지내왔던 것이다. 왜 저렇게 뛰어다닐까.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지. 나 역시도 어린이였을 때는 시끄럽고 떼를 쓰며 지냈는데, 홀랑 다 까먹고.


몸집이 작은 어린이가 보는 세계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어린이라는 세계』는 이야기한다. 책상 위에 있는 걸 책장에 꽂혀 있는 걸 보고 싶어 위험한데도 손을 댄다. 제대로 된 자기표현을 할 줄 몰라 크게 말하는 것이다. 김소영이 독서 교실에서 만난 어린이의 에피소드를 읽고 있으면 뭉클해지는데 그건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 어른들의 그것에 비해서 솔직하고 다정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여행을 가면 맛있는 걸 사와 독서 교실의 선생님에게 주고 자신이 읽은 책 중에서 좋았던 걸 선물하는 어린이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건 어린이가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한 김소영의 관점이었다. 예전에 보았던 다큐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쓰레기로 뒤덮인 집에서 한 어린이는 아빠와 아이들이 여행을 가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홀로 방치된 채 말이다. 자신의 상황과는 너무 다른 환상 속 세계를 보며 아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짐작하기조차 미안해졌다. 아이가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고 자신의 현실과 비교하는 게 아닌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환상을 파는 게 아닌.


아이들은 환상을 먹고 자라지 않는다. 누구보다 현실을 바로 직시하고 안정적인 세계로 나아가길 주저하지 않는다. 넌 몰라도 돼. 넌 어리니까 모를 거야 하는 말은 하지 말자. 우리 모두 알만큼 알았고 알았지만 모른 척하며 살았던 걸 잊지는 않았겠지. 어린이가 질주하는 차로부터 보호받으며 학교에 갈 수 있게 도와주는 어른으로서 '어린이라는 세계'에 안착하고 싶다. 그거면 된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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