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1
정소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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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소설을 읽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미쳐가고 있었다. 정소현의 소설 『가해자들』은 '나는 계속 견디는 중이었다'로 시작한다. 무엇을 견디는 것인지는 바로 밝혀진다. 아래층에 사는 인물은 위층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거실과 부엌, 방으로 이어지는 발걸음 소리. 콩콩, 쿵쿵거리는 소리들을. 아파트에 사는 이들이라면 한 번씩 경험해봤을 층간 소음을 『가해자들』은 다룬다. 소제목은 아파트 호수를 의미하는 숫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1111호. 가장 문제적인 집이다. 이 집으로 인하여 윗집, 아랫집은 모두 이사를 나간다. 여덟 살 아이가 있는 남자와 결혼한 주인공은 처음에는 밝고 순하고 긍정적이었다. 좁은 집에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아이도 낳았다. 시어머니는 그런 며느리를 못마땅해했다. 언제든지 첫 번째 며느리처럼 배신을 하고 집을 나가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너를 믿지 않는다는 말을 수시로 했다. 여자는 서서히 병들어갔다. 좁은 집에 살면서 들리는 위층의 소음도 한몫했다.


산후풍이라는 병명을 얻고 집에 들어앉아 버렸다. 바람이 몸에 스치기만 해도 아팠다. 결국 시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몸에 한기가 든다는 며느리 때문에 냉장고 문도 제대로 열지 못하는 갑갑함 때문이었다. 여자는 그 후로도 소음에 시달렸다. 위층에서 들리는 사소한 소음에도 반응했다. 여러 번 관리실에 항의 전화를 걸었다. 나중에는 천장을 찍기까지 했다. 아파트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에 집착했고 화장실에 우퍼를 설치해 놓고 음악을 반복적으로 틀었다.


1111호 아랫집에 사는 갓난 아기 엄마는 음악 소리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이가 조금만 울어대도 위층의 보복이 시작됐다. 급기야 1111호 옆집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여섯 살 아이를 키우는 1112호 여자는 1111호에서 항의를 하면 죄송하다고 자신이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노라고 했다. 주의를 하겠다고. 그럼에도 받는 문자와 보복 소음에 미쳐버린다.


다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20년 된 아파트에 살아서 어느 정도 소음을 껴안고 살았다. 아니 소음이라는 게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1111호에서 소음 항의가 시작되자 그제야 아파트에서 들리는 소리에 반응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가해자들』에서 자신들은 모두 피해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위치를 역전시킨다. 소음 관련 항의를 받으면 처음에는 나 역시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가해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미안해한다. 그 사실에 경악하기도 한다.


늘 참고 견디고 살았던 나인데 누군가를 힘들게 했었음에. 조심하고 또 조심하지만 일상 소음이 나지 않을 수는 없다. 여러 번 항의를 받고 나면 인식이 달라진다. 그때부터 문제는 시작한다. 1111호는 소음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바뀐다. 아파트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이해를 바라는 일은 어려운 일처럼 되어 버렸다. 피상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박에 없는 구조상(어쩌면 피상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아파트에 사는 것인지도) 내 처지를 모두 이해시킬 수는 없다.


『가해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피해자의 위치에서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아무도 자신이 가해자라고 말하지 않는 세상에서 피해자는 존재할 수 없다. 모두 피해를 주장하지만 가해를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서 피해는 인정되지 않는다. 『가해자들』에서 소음에 시달리는 이들은 여성이었다.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이 무서웠다. 공포는 낯선 것이 아닌 익숙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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