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에게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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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먹는다면 『복자에게』는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앉아 있는 모양만 바꿀 뿐 비루한 몸뚱이를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 그럴 수 없으리란 걸 알았다.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잊고 있었던 기억이 마구잡이로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전학, 1999년, 바람, 안녕, 가족과의 이별' 같은 단어가 나오면서 미숙하고 날카롭기만 했던 사춘기 시절이 강제로 소환되었다.


사업이 망해서 이영초롱이는 제주로 내려온다. 고모가 보건소 의사로 있는 고고리섬으로. 이를테면 남동생은 남자인 까닭에 그대로 서울로. 영초롱이는 여자라 제주로. 본섬도 아닌 배를 타고 한 번 더 들어가야 하는 고고리섬에서 영초롱은 좀처럼 적응을 하지 못한다. 그러다 그 애를 만난다.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며 말을 거는 그 애. 복자라는 아직도 애 이름을 이런 촌스러운 이름으로 지었을까 의문이 들게 만드는 그게 실명이 맞는지 아님 집에서 애칭으로 부르는지 한 번쯤 물어보고 싶게 만드는 이름을 가진 그 애 복자를.



『복자에게』를 다 읽고 나면 나는 나의 부서지고 훼손된 기억과 감정을 덧붙여 진지하고도 길고 다소 이상한 농담 섞인 독후기를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우린 모두 한 번씩 아니 몇 번씩이고도 원치 않는 이별과 재회를 반복한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것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잘못을 저지르고 나중에 찾아오는 후회로 가슴을 쳐야 했던 순간이 있었으니까. 꾸미지도 삭제하지도 않은 사실적인 기억을 『복자에게』라는 소설의 감상에 기대어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서. 소설의 끝이 있다는 게 다행이지만 나의 시간은 현재 진행 중이어서 책을 다 읽고도 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울분과 자책, 희미한 위로의 마음을 계속 간직할 수 없었다. 이불을 세탁기에 넣고 허기를 달래고 뉴스를 보며 그들이 쓰는 언어에 담긴 노골적인 편파와 지지를 감당할 수 없었다. 무지했던 과거의 나는 뉴스가 알려주는 대로 알기만 했다. 그리고 믿었다. 현상의 다른 면을 굳이 찾아보려 하지 않았다.


영초롱은 복자와 안정된 관계를 이어가지 못한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영초롱이 관여를 했고 말을 잘못했고 복자는 그걸 이해하지 않았다. 복자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수동이 아닌 이해하지 않았다는 능동의 형태로 영초롱이의 행위에 절교라는 형식으로 선을 그었다. 사실, 내 맘은 그게 아니었어로 시작하는 편지를 쓰려 했지만 영초롱은 마음이란 게 애초에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며 어른이 되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지도 못하며 영초롱과 복자는 살아간다. 그러다가 영초롱이 제주 성산 지법으로 거의 좌천되다시피 내려온다. 다랑초 시절 자신을 좋아하던 고오세를 만나 복자가 제주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복자가 지금 힘들다고도. 영광 의료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위험 약품을 가루로 만드는 파우더링 작업을 했는데 그 일로 아이를 유산했다고. 복자뿐만이 아니라 다른 간호사들도 유산을 하고 기형아를 출산했다는 상황을 듣는다.


판사가 되어 모든 일을 '판사 에고'로 바라보는 영초롱. 위험이 존재했고 그 위험 속에 자신들을 밀어 넣었다는 사실을 진실로 만들려는 복자. 『복자에게』는 제주의료원에서 있었던 실제 사건이 모티브가 되었다. 제주에서 한동안 지냈던 김금희는 무엇을 쓸 수 있을까 하던 생각을 버리려던 차에 의료원 사건을 접한 뒤 소설을 쓸 수 있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그러니까 소설을 쓴다는 건 무엇을 알고 나서야 가능하다. 소설을 읽는다는 건 무엇을 알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인 거다.


뉴스에서 알려주지 않은 진실. 감추고 왜곡하고 이익을 떠올리며 편집한 사실을 내보내는 뉴스에 나오지 않은 진실이 『복자에게』에 있었다. 힘든 노동의 시간을 함께 보냈던 동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은 사람들의 연대를 읽을 수 있는 소설. 치사하고 더러운 세상의 이면에 감춰진 따뜻한 손을 내밀어 용기를 주고받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얼굴을 만날 수 있는 『복자에게』. 소설은 너로 살아갈 수 있다고 울고 있는 나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어 준다.


슬픔의 시간을 건널 수 있는 건 농담이었다. 우리는 은근슬쩍 건넨 농담에 웃어 주고 안녕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안녕을 물어야 하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 나의 실패는 나의 실패로. 너의 실패는 나의 서러움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어른으로 살아가야 한다. 슬픔을 극복하는 힘에는 단순한 진실이 있었다. 나는 잘 할 수 있다고 몇 번이고 나에게 힘을 넣어 주는 일. 그 힘으로 나의 실패를 과거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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