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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9월
평점 :
원래는 책을 빨리 읽는 편이다. 이상한 강박을 가지고 있어 한 번 읽기 시작한 책은 재미있든 없든 끝까지 본다. 포기하지 않고 읽었어. 거 봐. 해냈잖아. 하는 다소 모자란 성취감을 얻기 위한 행위로 독서를 한다. 잘 하고 꾸준히 하는 게 독서. 최소한의 에너지로 할 수 있는 독서. 눕거나 누워 있거나 드러눕거나 드러누워서 할 수 있는. 책을 읽으면 일상의 잡념이 조금씩 엷어진다.
손원평의 『프리즘』을 무려 5일 동안 읽었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렇게까지 오래 읽을 책이 아니다. 네 남녀 간의 만남, 사랑, 엇갈림, 일상의 감정을 부드러운 언어로 그려낸 소설이라 금방 결말로 도달할 수 있다. 책을 읽는 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고 쓴다. 전부를 이야기할 순 없다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 안온한 일상을 내내 꿈꾸지만 그건 꿈일 뿐. 일상의 균형이 어긋나자 감정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소설 속의 사람들처럼.
『프리즘』은 완구 회사에 다니는 예진이 여름의 한낮에 서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시끌벅적한 거리에서 비켜나 있는 골목의 가게 아래 서 있는 예진. 자신만의 장소를 찾은 듯한데 한 사람이 예진 옆에 와 있다. 같은 건물 지하에서 영화 사운드 작업을 하는 도원. 묘한 인연으로 둘은 여름의 낮 동안 커피 타임을 함께 한다. 예진은 도원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도원은 그런 예진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헤어진 연인이 보내오는 거친 연락에 힘들어한다.
예진과 도원이 만나는 골목에서 비껴난 곳에 이스트 플라워 베이커리가 있다. 사장인 재인과 종업원 호계가 있는 곳이다. 재인은 전 남편과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헤어졌지만 완벽하게 헤어지지 않은 어정쩡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호계는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독립해서 살아가고 있다. 부모와 불화했고 깊은 만남은 일부러 피하는 편이다. 『프리즘』은 일상의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상태의 네 남녀를 자연스럽게 한자리로 모은다.
예진은 도원에게로. 도원은 오래전 알았던 재인과 재회해 다시 재인에게로. 호계는 예진에게로. 사람은 모였지만 마음은 모이지 못한다. 상대의 등에 마음의 화살표를 쏘기만 한다. 사랑의 스튜디오라는 프로그램에서 상대를 향한 화살표를 보내지만 나에게는 화살표가 오지 않고 다른 이에게 간 상태를 상상하면 된다. 일방적인 사랑의 마음은 나를 향한 연민이 되고야 만다.
사랑의 순간에도 진실을 감출 수밖에 없는 상황. 단순한 진심이 필요한 순간. 어떤 선택을 하든 책임은 자신이 질 수밖에 없음을 『프리즘』은 말한다. 계절이 바뀌듯 사람의 마음과 처지에도 변화가 생긴다. 자신 안에 감춰진 불온함이 드러날 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순식간에 미움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무작정 나를 버리고 싶을 때. 지금을 포기하고 싶을 때. 『프리즘』은 그런 나를 받아들이며 그럴 수도 있다고 토닥일 줄 알아야 일상을 살아낼 수 있다고 속삭인다.
소설을 천천히 읽어가는 동안 가을이 왔다. 마스크 사이로 금목서 향기가 맡아지고 볕이 뜨겁다가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선택을 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며 나를 지켜가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엇갈린 사랑의 순간을 버텨내고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 노력을 하기로 한 예진, 도원, 재인, 호계. 그들의 담담한 오늘에 안녕을. 좋아질 내일에 응원을. 다시 출발선에 선 나의 오늘과 내일에 위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