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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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모습을 보면 믿기 힘들겠지만 나는 연약한 아이였다. 햇빛을 오래 보면 어지럼증을 느껴 아무 데나 앉아 있었고 환절기가 되면 아파서 학교를 쉬어야 했다. 절정에 달했던 시기는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계속 설사를 하고 구토를 했다. 병원에 가보았지만 딱히 나아지는 기미가 없었다. 자다가 일어나 어둠 속에 앉아 있곤 했다. 흑색의 우주 어딘가로 떨어지는 기분을 자주 느꼈다. 막막하고 암담한 느낌에 많이 울었다.


학교도 못 가고 집에만 누워 있을 때 엄마는 비밀을 하나 알려준다는 듯이 말했다. 점쟁이가 그러는데 넌 열세 살이 고비래. 열세 살 전에 죽을 수도 있는데 그걸 넘기면 오래 살 거래. 그 말을 듣고서 더 아픈 것 같았다. 곧 죽는 거 아닌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어떡하든 버티고 버텨서 장수해야 할 텐데. 불끈한 의지 대신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 어쨌거나 열세 살을 넘기고 매일 걱정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어른이 되었다.


점쟁이한테 딸의 운명을 물으러 간 엄마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뭐라고 들었을까. 아홉수를 조심하라고 했을까. 깊은 병이 들어 병원에 있을 때 엄마는 올해가 아홉수라고 자신은 곧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죽는데 나는 그걸 믿지 않았고 엄마가 떠남으로써 죽음을 실감했다. 일상에 잠재 된 알 수 없는 불안과 고독이 밀려오면 이렇게 되뇐다. 괜찮아. 아직 살아 있잖아. 다행인거지.


오라시오 키로가의 단편집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압축하는 주제로서 작용하는 사랑, 광기, 죽음을 다룬다. 백 년도 전에 쓰인 소설은 깜짝 놀랄만한 반전을 가진 줄거리와 읽기 쉬운 현대적인 문장 표현으로 재미를 가져다 준다. 세계문학이라고 하는 작품들이 가지는 서사의 빈약함을 찾아볼 수 없다. 지루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지 않는다. 결말에서는 허를 찌르며 깔끔하게 퇴장하는 방식이다.


환상과 현실을 가볍게 넘나든다. 현실에서 동떨어진 이야기에는 감정 이입이 되지 않아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소설은 손이 가지 않았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기묘한 환상을 몰입감 있게 풀어내는 솜씨가 훌륭하다. 납득할만한 현실적인 환상이 소설 전반에 흘러 계속 읽고 싶게 만든다. 먼저 사랑이 있다. 아니 광기가 있다. 그것도 아니다. 죽음이 있다. 이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랑, 광기, 죽음은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순서 없이 뒤죽박죽인 모양새로 찾아온다는 뜻이다.


한눈에 반해 연인이 되고 싶어 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추억 속으로 간직해야 하는 사랑(「사랑의 계절」). 부부 사이의 사랑이 식어 서로를 미워하는 이야기로 흐를 것 같았지만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중에서 최고의 반전으로 끝을 맺는 「엘 솔리타리오」 속 광기.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파괴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말하는 죽음(「목 잘린 닭」). 열여덟 편의 소설은 사랑, 광기, 죽음을 돌림 노래처럼 변주한다.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는 사랑이란 한순간의 착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말하는 소설이다. 사랑의 이중성을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죽음의 순간을 포착하여 들려주는 방식으로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흘러간다. 「표류」는 죽어가는 순간이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임을 극한의 해방감이 찾아오는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원통하고 두렵지 않을 수 있다는 약간의 위안을 준다.


사랑을 말하다가 결국엔 죽음으로 귀결되는 구조를 가진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오라시오 키로가는 공포와 기괴를 절묘하게 배합한다. 서술자는 인간과 동물이 사이좋게 나눠 갖는다.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 혹시나 잠이 들면 죽게 되진 않을까 두려움에 떠는 심약한 어른의 얼굴로 기묘한 도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죽음에의 공포가 깊다면. 한 번쯤 죽음과 조우해 봤다면. 급작스럽게 찾아온 가까운 이의 죽음에 상처를 받았다면. 대체 죽음이란 녀석을 내 삶에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인지 근심해 봤다면.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를 읽으며 죽음의 고통에 인생 전체가 함몰된 소설가의 답안을 슬쩍 베낄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대 곁으로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다. 사랑이 시작되고 광기가 휘몰아친 다음에 죽음은 다가온다. 그러니까 죽음은 우리가 사랑했었다는 기억의 증거이다. 그 기억이면 된다. 남은 날들에 대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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