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설 보다 : 여름 2020 ㅣ 소설 보다
강화길.서이제.임솔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이제 구월. 아직도 2020년이 지속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많은 일이 일어나고 많은 일을 경험하고 많은 시간이 흘러간 것 같은데. 이렇게 가다가는 영원히 2020년이 계속되고 있지 않을까. 스티븐 킹 식대로 이해한다면 다른 세계에서 2020년을 무한 반복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도 같다.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과 소중한 시간이니 감사히 살아가야지 하는 두 개의 마음을 가지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계절의 소설로 문지에서 기획한 '소설 보다 시리즈' 여름을 뒤늦게야 읽었다. 『소설 보다 여름 2020』에 실린 세 편의 소설은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는 혹은 환멸에 가까운 감정으로 복기한다. 순간을 살아가다 보면 순간을 놓친다. 뒤늦게야 깨닫는다. 그때의 감정과 기분은 처참했으며 대뇌피질 어느 구석에도 저장하고 싶지 않다고.
강화길의 「가원佳園」은 밥값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외할머니를 이해하기 위한 소설이다. 담임 선생님의 좌우명이 '밥값을 하자'였더랬다. 초등학생인 나는 그 말에 살짝 감동했다. 정직, 믿음, 사랑 같은 추상어가 아닌 일상어로 신념을 이야기하는 어른을 처음 만난 것이다. 그 이후로 한동안 나의 좌우명도 밥값을 하자였다. 이 말은 지키기가 어려운 성질의 것임을 나중에야 깨닫고는 되는대로 살고 있다. 밥값을 하는 인간 보다 밥이라도 실컷 먹는 인간이 되자는 식으로. 강화길은 여성 화자의 목소리를 다르게 들려준다. 「음복」에서는 제삿날 며느리의 목소리로. 「가원佳園」에서는 평생 한량으로 살아간 남편을 둔 아내의 목소리로. 각자의 이름을 가져야 한다고 나직하게 외친다.
서이제의 소설은 처음 읽어본다. 「0%를 향하여」. 어쩐지 서이제의 소설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읽을 것 같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독립 영화를 보기 위해 대전까지 찾아간 기억으로 지금은 영화를 만들다 백수로 지내는 '나'. 모르는 사람과 허물없이 대화를 하고 친구들을 찾아가서는 물회를 얻어먹으며 한국 영화의 독립을 꿈꾼다. 독립이 되지 않을 것임에도. 한국 영화 100주년의 역사를 귀엽게 훑어가면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같은 감히 내가 건드리지 못할 것 같은 사조를 비꼰다. 관념, 추상, 현학적으로 소설이 흘러가지 않아서 좋았다.
미주신경성 실신을 앓고 있는 이 병은 질환은 아니고 증상이라고 하는데 하여튼 미주신경성 실신 증상이 있는 진영. 임솔아의 「희고 둥근 부분」은 진영이 증상의 완화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모가 겪은 죽음에의 기억.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의 기억은 대를 건너서 진영에게로 옮겨 온다. 진영 역시 가르치는 학생을 방관 혹은 간섭했다는 추측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실신을 하고 죽음의 위협을 느낀다. 어렴풋하고 희미한 희고 둥근 부분을 찾아다니며 삶의 기운을 회복한다.
겨우 구월. 고통은 끝나고 삶은 계속된다. 나는 나대로 살아갈 힘을 찾는다. 책을 읽고 신기한 경험을 하는 일로. 『소설 보다 여름 2020』을 다 읽었더니 서점 앱 푸시 알람으로 『소설 보다 가을 2020』이 나왔다고 떴다. 우연일까. 장바구니에 쏘옥 가을을 집어넣었다. 며칠 후면 가을이 배달되어 오겠지. 괜찮고 괜찮을 것이다. 그래서 겨울을 읽을 수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