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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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가고 계절은 가을로 변해 있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매미는 안녕이라고 말했을까. 엄청 크게 인사하고 떠났을 텐데. 못 들었다. 그 자리에 풀벌레들이 찾아왔다. 어서 와. 가을이야. 백수린의 『여름의 빌라』에 담긴 여덟 편의 소설을 읽어나가는 일은 과거의 시간을 소환하는 과정이었다. 서랍 속에 부끄럽고 치졸했던 시절을 안 보이게 넣어 놨는데.


『여름의 빌라』의 첫 번째 소설 「시간의 궤적」에서는 관계의 무심함을 이야기한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주인공이 주재원인 언니를 만나고 함께 한 시절을 회상한다. 언제까지나 열렬한 시간이 계속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과거는 힘이 없음을 말하는 소설이다. 표제작인 「여름의 빌라」에서 추억 역시 현재까지 오는 데에는 소진된 힘 밖에는 없다고 보여준다. 다른 문화에서 살아가는 두 부부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만남에서 평안을 빌어주고 끝이 난다.


「고요한 사건」과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에서는 혼란으로 가득한 학창 시절을 불러온다. 어리고 미숙했다. 성장 소설의 궤를 같이 하는 두 편의 소설에서 그래 어떡하든 무사히 통과했잖아 안심하게 만든다. 「폭설」과 「흑설탕 캔디」에서는 이전에서는 만날 수 없던 여성상을 그린다. 「폭설」은 어머니. 「흑설탕 캔디」는 할머니. 그들에게 양보, 배려, 평화의 의무를 강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두 편의 소설에서는 사랑, 자신, 자존감을 토대로 내일을 그리는 여성이 나온다. 그래서 희망이 된다.


그러면서도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와 「아주 잠깐 동」안에는 포기, 체념, 허무로 가득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을 그린다. 백수린 소설의 장점은 자의식 과잉으로 흐르지 않는 문장에 있다. 부드럽고 긍정적인 비유를 쓸 줄 안다는 것. 부정과 혐오의 시선이 아닌 긍정과 사랑, 위로의 의식에서 『여름의 빌라』는 쓰였다. 아무 이유 없는 위로가 필요한 시절이다, 지금은.


무턱대고 무책임한 응원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


안녕이라고 듣지 못했지만 여름은 다시 올 것이다. 매일 인사를 주고받지 못했더라도 모두 잘 있겠지. 『여름의 빌라』는 다정하지 않았더라도 현재로 오게 되는 기억에게 지금은 괜찮다고 말해준다. 나의 세계로 느닷없이 굴러온 환멸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지 『여름의 빌라』를 읽으며 고민한다. 사랑으로 가기 위한 용기를 얻기 위한 책 읽기의 시간으로 가을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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