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오늘의 젊은 작가 27
은모든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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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잘 듣는 사람이 되었다. 그야말로 어쩌다. 심지어 누군가 내게 간증까지 했다. 나와 이야기하다 보면 없는 걱정까지도 만들어서 털어내고 싶다고. 훌륭한 청자라고 자랑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나도 수다 떠는 거 좋아한다. 내가 뭘 좋아하고 관심 있어 하는지 어제 본 예능은 어땠고 영화 내용은 왜 그런지 주절주절 떠들고 싶다. 단 떠들고 싶은 상대가 없다는 것. 겨우 대화를 시도해도 영혼 없는 반응과 냉대에 마음에 상처를 받는 경험이 깊어져 입을 닫고야 만다.


은모든의 소설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의 주인공 경진은 오묘한 사흘 동안의 휴가를 보낸다. 생물학을 전공한 경진은 과외로 생활비를 번다. 공기업을 뚫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하며 날린 이십대의 시간을 지나 이제는 평범하고 아담한 생활을 이어 나간다. 과외 스케줄이 비는 사흘의 시간. 경진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침대에 누워 쉴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벅차올라 나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낮잠을 잘 때쯤 친구 은주에게서 연락이 온다. 그 후부터 다소 이상한 시간을 보낸다. 경진을 만나는 모든 이들이 경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먼저 은주. 상견례 자리에서 불쾌함을 맛보았다.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고 선언했는데도 어른들은 막무가내였다. 그 옆에서 남편 될 인간은 웃기만 해서 더 빡쳤다. 다이어트 중 보상 데이를 맞기도 한 은주와 흑돼지 두루치기를 먹으며 경진의 휴가가 지나간다.


이 년 동안 만나지 않은 엄마를 찾아가기로 불쑥 결심한다. 기차 안에서 만난 사회복지사 여인과 이야기를 나눈다. 한 편의 영화 같은 장면들이 펼쳐지는 소설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를 이루는 감성은 따뜻한 연민이다. 대놓고 불쌍해라며 같잖은 위로를 하는 동정이 아닌 한 발자국 떨어져서 웃음을 보여주는 위로로써 소설은 흘러간다. 처음 만난 이에게 불쑥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고 덮어두었던 슬픔의 장면을 펼쳐 보인다. 그런 그들의 사연을 경진은 훌륭히 듣는다.


마주 앉아서 혹은 옆에 서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렇게 듣다 보면 모르고 지나친 시절의 비밀을 알게 되는 행운을 만난다. 경진은 그들의 이야기에 어설픈 위로나 공감을 표현하지 않는다. 한두 마디를 하다 보면 안다. 이 사람이 나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듣고 있는지 대화할 의지가 있는 사람인지를. 대부분 그렇지 못해서 책을 읽는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글로 표현되어 있을 때 희열을 느끼기 위해서.


이년 전 엄마가 느꼈던 감정과 경험에 대해 듣게 되는 경진. 사흘의 휴가는 누군가의 내밀한 속 사정을 듣는 것으로 시작해서 듣게 될 순간으로 이어진다. 현실에서 듣지 못해 서글펐던 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선생님한테 한 번 말해 봐. 천천히 다 들어 줄게. 오늘 시간도 한 시간 더 있잖아"의 세계. 심장이 쫄깃해지는 사건이나 반전이 드러나는 구조의 소설이 아니라도 다음 페이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은모든의 소설 세계.


이주란과 더불어 은모든은 2020년에 발견한 최애 작가로 나만의 리스트에 올랐다. 이토록 평범한 일상의 속삭임을 들려주다니. 바라던 꿈의 문턱에서 넘어진 게 아니라 잠시 쉬고 있다고 말해준다. 열렬히 꿈을 향해 달려가지 않아도 된다고도. 눈을 맞추고 박수를 쳐주며 이야기를 보내는 한 시절을 살아도 우리의 미래는 밝아진다는 힌트를 건너며 소설은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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