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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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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의 장편 소설 『시선으로부터,』에는 많은 인물이 나온다. 책 앞에 있는 심시선의 가계도를 보면서 소설을 읽어 나갔다. 한국 현대사의 슬픈 민낯을 정세랑 식으로 보여준다. 직설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슬픔의 정서를 밑바탕에 깔아두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6.25 때 심시선은 육촌 오빠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가족을 기다리는 와중에 고발이 있었고 둘째 오빠와 온 가족이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
그 이후 심시선은 육촌 오빠 아내의 주선으로 하와이로 이민을 떠난다. 세탁 공장에서 일을 했고 길에서 화가 마우어를 만나 인생의 항로가 바뀌었다. 그림을 그렸고 마우어를 견뎠다. 심시선은 지독한 냉대와 간헐적인 폭력을 이겨낸다. 요제프 리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소설은 심시선이 죽고 10년이 되는 날 큰 딸 명혜가 하와이로 가서 제사를 지내자는 제안으로 시작한다.
나는 많은 인물 중에 난정이 좋았다. 시선으로부터 걔?라고 불리는 아들 명준의 부인이기도 한 난정. 딸 우윤을 낳았지만 아팠다. 아픈 아이를 돌보면서 난정은 책 읽기로 두려움을 달랜다. 죽음이 문 앞까지 찾아왔을 때 불안함을 이겨낼 수 없을 때 책을 읽는다. 시어머니 시선으로부터 글쓰기를 권유받지만 물리친다. 그저 자신은 읽는 인간으로 남고 싶다고 말한다.
명혜의 제안으로 하와이를 떠나면서도 전자책을 챙긴다. 『시선으로부터,』는 심시선이 살아생전 쓴 책의 일부와 했던 말에 기대어 시선의 자녀와 손녀의 현재를 그린다.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시선의 당부가 있었다. 그렇지만 명혜는 10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시선이 이민을 가서 생활했던 하와이로 가족을 데리고 간다. 하와이에 가서 전 부치고 상 차리는 일을 하자는 게 아니라 시선에게 보여줄 기억할만한 물건과 경험을 상에 올리자는 발상이다.
시선이 걸어온 길을 추억하고 기억하는 가족들이 남아 있는 한 시선은 끝까지 애도의 대상이 될 것이다. 죽음은 한 사람이 있었다는 걸 믿지 못하게 만든다. 정세랑은 사랑으로써 한 사람을 기억하자고 말한다. 허례와 허식으로 제사상을 꾸리며 남아 있는 이들의 시간을 소모하는 게 아닌 일상을 살아가는 형태로 그를 잊지 말자고도. 정세랑의 소설에는 꼬이고 비틀린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시선으로부터,』는 누군가를 오해했다면 이해하는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자고 우리를 다독인다. 소박한 꿈에 대해. 좋아하는 취미에 대해. 현재의 불안에 대해. 망설임 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가족의 모습을 『시선으로부터,』에서 만날 수 있다. 단순히 성별로 가족 내에서 역할을 규정짓지 않는다. 자유분방한 시선의 피를 물려받은 심 씨네 가족. 미움 없이 서로의 행복을 기원해 주고 의심 없이 고민을 들어준다.
다른 사람들처럼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소설의 특징을 쓰고 싶은데 잘 안된다. 정세랑의 소설은 분석하지 않으면서 읽게 된다. 그냥 읽는다는 표현이면 어떨까. 어떤 문장에서는 명료해지고 순수함이 밀려온다. 책을 오랫동안 부여잡고 읽는데도 그 시간이 황홀하다. 현실의 편협한 인간관계를 극복하고 싶을 때 소설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세계는 정세랑이다.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그러니까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사용하면서 시선의 세계는 끝나지 않음을 제목인 『시선으로부터,』는 의미한다. 시선의 뿌리를 이어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계속되는 것이다. 정신없지만 정신을 잃지 않는 심 씨네의 가족들의 다음 편을 기대한다.